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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14. 2021

'병원 객사'를 피하는 법

<죽음을 배우는 시간> 김현아

예전엔 집 밖에서 죽는 것을 '객사'라고 해서, 매우 꺼려했다. 지금은 죽기 전에 병원이나 요양원에 가서 죽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죽는 것은, 정작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의 뜻이 아니라 가족과 의료진 등 편의와 이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죽음의 주체는 사라지고 타자가 죽음을 쥐락펴락하는 이런 상황은 결코 좋은 죽음도, 바람직한 죽음도, 존엄한 죽음도 아니다.

<죽음을 배우는-시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창비, 2020년 초판, 김현아 저)은, 앞서 소개한 일본인 의사 야마자키 후미오씨가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의 속편 같은 느낌을 준다. 두 책 모두 병원이 인생의 최후인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야마자키씨의 책이 종말기 환자를 대하는 병원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면, 김현아씨의 책은 어떡하면 병원에서 무의미하게 죽지 않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의 국적에 따라 야마자키씨는 일본 병원의 현실을, 김현아씨는 한국 병원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지만, 연명지상주의, 환자의 존엄보다 병원의 논리를 앞세우는 의료 현실은 두 나라 모두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김현아씨가 먼저 나온 야마자키씨의 책 내용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 사례를 모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김현아씨가 참고한 도서목록엔 야마자키의 책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이를 통해 오히려 '병원이 사람의 마지막 운명을 맡기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사실이 어느 한 나라만의 사정이 아니라 만국 공통의 문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30년 경험의 류마티스내과 의사인 김현아씨는 '죽음의 의료화'가 구조화된 병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는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 그것이 '죽음을 배우는 시간'의 가장 첫 메시지"라고 말한다. 따라서 각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미리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김현아씨의 결론이다.

우선 김씨는 '죽음의 의료화'가 상태화된 병원의 현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다음은 노화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치료 가능한 병으로 둔갑한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결국 쇠약해진 노인이 사망하는 맨 마지막 단계, 근력약화에 의한 활동력 저하→식이 섭취 부진→영양실조 및  탈수에 의한 장기 기능 저하→인두근 약화에 의한 흡인과 폐렴→사망이라는 과정이 모두 처치가 가능한 질환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99페이지)

급성 치료에 중점을 두어온 의료기술이 만성질환 치료에 그대로 전용되고 있는 문제, 과도한 검사로 갑상선 암이 급증한 문제, 형사 소추를 피하기 위해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살아나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에 반드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현실에도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그는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병원의 현실에서 "임종 직전에 병원에 옮겨오면 그 순간 연명치료의 굴레에" 빠지게 되고, 환자와 보호자들은 환자 치료에 대한 선택권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병원은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소로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더욱 그렇다"고 지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 바람직한 죽음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이 '아무리 외적인 요인을 개선시켜도 인간 실체에 내재한 죽음의 매카니즘은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정해 놓는 등 건강하고 정신이 뚜렷할 때부터 준비할 것을 주문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도중에 인터넷을 보니, "우리 국민의 75%가 연명치료를 반대하지만,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성인 인구의 2.4%인 100만명에 불과하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나도 갑자기 연명의료의향서를 써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가 '죽음을 의료화'하는 병원의 구조 문제보다 개인의 자세를 너무 강조하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조 문제의 해결은 어렵고 개인의 결단은 상대적으로 쉽다는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의 주장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쓴 '나의 데스노트'에 집약돼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도 있는 것이고 죽음은 삶과 결국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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