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지명 동해, 현실과 기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있는 바다 이름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 '동해(East Sea)'라고 부르고,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라고 부른다.
고지도를 조사해 보면, 18세기까지는 한국을 위주로 한 표기가 우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해라는 표기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국제적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일본해로 쓰는 지도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일본해의 확산에 더욱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수로와 해양 업무의 국제 표준화 등을 위해 설립된 국제수로기구(IHO)가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발간번호 S-23)였다. 1923년에 초안이 만들어지고 29년 총회에서 승인된 이 책자에서 아무런 이의 없이 동해수역이 '일본해'로 표기됐다. 잘 알다시피 이때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때이다. 덩달아 미국과 영국 주요국들도 '한 지형에 한 이름'이라는 원칙 아래 일본해를 사용했다. 동해는 세계무대에서 사라지고, 한국에서만 쓰는 명칭으로 축소되는 지경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1991년 유엔 가입을 계기로 반격에 나섰다. 1992년 제6차 유엔지명표준화회의에서 '동해'의 병기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일본해 단독 표기 관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즈음 민간 차원에서 동해 표기의 국제적 확산을 꾀하고자 설립된 단체가 '사단법인 동해연구회'다. 94년 설립된 이 단체는 다음 해인 1995년부터 2021년까지 한 해도 빼뜨리지 않고 '동해이름과 바다 이름에 관한 국제세미나'를 열어왔다. 국제적인 지명 전문가들과 함께 토의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동해와 일본해 병기의 논리를 가다듬고 확산하는 마당이 됐다.
드디어 국제수로기구(IHO)가 2020년 11월16일, 1929년부터 일본해를 수록하고 있던 문서(S-23)을 대체하는 새로운 문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정부가 이 기구에 처음 문제제기를 했던 1994년 이후 26년 만의 개가다. 이번 국제수로기구의 결정의 핵심은 구체적인 이름 대신에 '숫자로 된 고유의 식별 체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동해를 문서에 집어넣지는 못했지만, 일본해 단독 표기의 근거를 무력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이 그간 벌인 노력이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동해 명칭 싸움의 주전장이 국제수로기구에서 각국 정부, 지도제작자, 미디어계, 학계, 일반 시민 등 각계로 분산, 확산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마침 일본 외무성이 9월부터 유투브를 통해 "동해가 아닌 일본해가 국제적으로 확립된 공식 명칭"이란 다국어로 된 영상을 올리며 국제 선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영상은 동해-일본해 명칭 싸움이 국제수로기구의 새 결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국이 30년 동안 동해 표기를 위해 벌여온 활동과 성과, 그리고 과제를 담은 책, <분쟁지명 동해, 현실과 기대>(푸른길, 2021년, 주성재)가 최근 출간됐다. 저자인 주성재씨는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로, 현재 동해연구회 회장이다. 나도 그와 함께 동해연구회 활동을 다년 간 해왔다. 나와 대학교 입학 동기이지만, 대학 시절보다 동해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더욱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2021년 10월에 강릉에서 열린 동해연구회 주최 '제27회 바다 이름 국제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저자로부터 직접 책을 받았다. 덕분에 오사카총영사 3년 동안 동해 표기 논의에서 멀어졌던 공백을 이 책을 통해 메울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동안 동해 표기 확산운동을 처음부터 최근까지 전개과정을 솜씨 좋게 정리한 '동해 표기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리한 모든 문제제기, 평가, 제언이 동해연구회의 입장이 아닌 개인적 소견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동해연구회에 쏟아온 열정과 대표성을 감안하면, 그의 생각이 동해연구회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민족주의'와 '국제보편'이라는 양극의 원심력이 작용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잡으며 연구회를 이끌어온 저자의 내공이 엿보이는 책이다.
한국의 동해 표기에 관한 입장은, 일본과 '제3의 이름'를 포함해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일본해와 함께 병기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처음 단계에서는 탈식민주의 관점이 강했으나 논의를 거듭하면서 '문화유산으로서 고유지명의 존중 '이라는 논리가 점차 강해졌다. 일본은 시종일관 '국제적으로 정착된 이름'이라는 논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저자는 책 마지막 장에서 동해 병기를 이루기 위한 세 가지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세계지도나 문서에 표기된 'Sea of Japan'을 오류라 말하지 말고, '하나의 지형물, 하나의 지명' 원칙에 따라 'Sea of Japan'을 쓰는 다른 나라를 비난하지 말며, 병기를 한국에서 선도적으로 실시하자는 것이다. 저자가 굳이 도발적 제안이라고 한 것은 '동해 단독 표기'를 원하는 대다수 한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 같다. 하지만 동해 병기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의 인정을 끌어내야 하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성숙하고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