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소수의 독재'로 전락한 미국을 구하려면?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와 페르난두 리몽기는 (지금 달러 기준으로는 1인당 GDP가 약 1만6천 달러였던) 1976년의 아르헨티나보다 잘 사는 어떤 국가의 민주주의도, 또 민주주의 역사가 50년 이상 된 어떤 나라의 민주주의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연구해 1997년에 발표한 논문 <근대화 : 이론들과 사실들>를 통해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1인당 GDP가 1만8천 달러에 달했던 헝가리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졌고, 2020년 기준 6만3천 달러나 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붕괴 직전에 있다. 윤석열 정권의 한국 민주주의도 비슷한 처지다. 심지어 미국은 150년 가까이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특히,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부자 나라일수록, 민주주의가 정착한 지 오래된 나라일수록 민주주의는 절대 안전하다는 이러한 정치학자들의 신화는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어크로스,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2024년 5월)는 공고해 보이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졌고, 민주주의를 복구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다. 하버드대학 정치학과 교수들인 이들이 몇 년 전에 내놨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속편이다. 한국에서 번역 출판하면서 '어떻게'로 운을 맞췄지만, 전작의 영어 제목은 'How Democracies Die'이고 이번 책 제목은 'Tyranny of the Miniority'이다. 한글 제목에 소수를 '극단적 소수'라고 좀 과장해 적은 것은 상업적인 의도를 반영한 것이리라.
전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가 트럼프의 등장 배경을 분석했다면, 이번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지도자를 막으려면 미국의 정치 제도를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이 책은 2021년 1월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두 사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월 5일에 미국 조지아주에서 남부 사상 두 번째 흑인 상원의원이 탄생했다.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통과 이래 미국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다인종 민주주의'가 한 발 더 진전한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인 6일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해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이른바 '1.6 쿠데타'다. 미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만천하에 알린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두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다인종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인종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백인 민족주의, 백인 중심주의자들의 저항과 반발이 여전히 강고하다. 트럼프는 미국의 다인종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것에 불만이 많은 백인 중심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이 책은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실시 이후 다인종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막으려는 백인 중심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분석한다. 남북전쟁 이후 인종 차별을 묵인하는 것을 전제로 봉합됐던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1960년대 시민권 운동으로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이때 공화당은 흑인과 이민자의 득세에 불만을 가진 남부의 백인을 포섭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이제까지 '북부 공화당 대 남부 민주당'이라는 정치구도가 '백인 중심 공화당 대 흑인·소수자 중심 민주당'의 구도로 변했다. 트럼프는 이런 구도가 극단화하면서 나온 필연적인 산물이다.
문제는 트럼프와 같은 극단주의자가 민주주의의 아성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어떻게 등장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답은 소수를 우대하는 미국의 헌법을 비롯한 정치제도에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미국이 헌법을 제정할 때 소수의 주와 남부 흑인 주를 껴안기 위해, 불가피하게 소수를 우대하는 방향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소수가 다수의 뜻을 무시하고 활개를 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헌법을 개정할 때 상·하원 모두 3분의 2의 찬성에 더해 4분의 3 이상의 주가 동의를 해야 한다는 조항, 상원의 수를 인구 수와 관계없이 모두 2명씩으로 하는 제도, 대통령을 직접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제도, 상원의 60%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법안도 인사도 할 수 없도록 한 상원 우의의 구조, 대법원 판사의 종신직 등이 다수의 뜻을 무시하고 소수가 독재할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제도와 관행들이다.
이런 소수 우대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공화당이 되면서, 공화당이 미국 민주주의를 해치는 최대 위험 세력이 됐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다음 대목을 공화당이 백인 중심주의로 극단화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공화당은 시골 지역에 편향된 제도를 기반으로 전국적인 보통선거에서 계속해서 패하면서도 대선에서 승리하고 상원까지(결국 대법원도) 장악했다. 말하자면, 공화당은 경쟁해야 할 동기를 무디게 만드는 '헌법적 보호장치'의 수혜자가 되었다. <중략>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공화당에게 내어준 선거 목발은 공화당의 극단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공화당이 '전국 선거에서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권력을 차지하고 휘두를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할 전반적인 동기를 상실해버렸다."(281쪽)
저자들은 지금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트럼프와 같은 극단주의자의 등장을 막기 힘들다고 비관적으로 말한다. 다음 대목을 보자.
"지나치게 반다수결적인 미국 헌법은 단지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만은 아니다. 미국은 헌법은 전제적인 당파적 소수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 헌법은 개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미국은 이제 그 제도 안에 갇혀버린 듯 보인다.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321쪽)
저자들은 이런 비관 속에서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그들이 내놓은 방안은 세 가지다. 하나는 투표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흑인과 소수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제도와 관행을 뜯어고쳐, 투표권을 다른 나라들처럼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선거 결과가 다수의 선택을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이 제기하는 핵심 문제는 선거인단의 간접 대통령 선출 방식의 폐지, 상원의 인구 비례 선출, 하원과 주 의회 선거의 비례제 도입이다. 세 번째는 지배하는 다수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원의 필리버스터제를 폐지하고, 대법원 판사의 임기제를 도입하고, 헌법 수정 때 4분의 3 이상의 주 찬성 조항을 없애자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런 개선 과제들은 미국보다 훨씬 뒤에 나온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미국 사람들은 미국 헌법을 마치 '신'적인 존재, 신성불가침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헌법 제정 과정으로 보면 소수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타협한 정치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들은 결론적으로 과도하게 소수의 권한을 보장하는 헌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어둡다면서 지속적인 공론화와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민권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진정한 다인종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할 과제는 이제 우리에게 남겨졌다. 미래 세대는 훗날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 마지막에 남긴 문장이 미국 민주주의가 지금 얼마나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