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바이러스>, 정한론, 이현주, 반일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판할 때 '반일'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일본에서는 '혐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심지어 일본의 책방에는 '혐한 코너'라는 서가까지 만들어 놓고 한국을 비판하는 책을 판매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가 상대국, 그것도 이웃나라를 이렇게 공공연하게 비하할 수 있을까?
나는 일본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에 종종 '혐한'이라는 용어 사용의 부당성에 관해 정색하고 항변하곤 했다. 어떤 나라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반한'이나 '반일'은 쓸 수 있지만 '혐한'이라는 말은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이니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일본 사람들은 반론하기보다 침묵하거나 '글쎄'하는 정도로 외면하는 게 보통이었다. 반론할 논리가 궁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혐한뿐 아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일본 미디어는 빠짐없이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에 '상륙'했다"라고 보도했다. 반면, 러시아의 지도자가 일본과 영토 분쟁 중인 북방 4섬을 방문할 때는 '방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에 관해서도 일본 미디어 관계자에게 물은 적이 있지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혐한' '상륙' 같은 용어는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 멸시관'과 맞닿아 있다. <일본발 혐한 바이러스>(도서출판 선인, 이현주 지음, 2021년 10월)는 일본 사람과 사회, 국가가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혐한의 뿌리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인 이현주 씨는 전문 외교관 출신이다. 외교관으로서 첫 해외근무를 도쿄 일본 대사관에서 했고 마지막 직책이 오사카총영사였다. 외교부에서 일본 통을 가리키는 '저팬 스쿨'은 아니지만, 일본 전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정통 저팬 스쿨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을 더욱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문재인 정권 때인 2019년 7월 1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취한 전력 물자 수출제한이다. 그때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일본의 의도와 배경에 관해 질문을 하고 그가 답하는 과정에서 아예 책을 쓰는 게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고, 마침 공직에서 떠난 뒤여서 혹하고 집필하게 됐다고 한다.
집필 동기는 우발적이지만, 책 내용은 깊고 졸깃졸깃하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3년 동안 국내외에서 나온 일본과 관련한 책 400권을 탐독한 뒤 정리한 것이라는 필자의 얘기만 봐도 어지간한 박사 논문 이상의 공력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마디로 "혐한은 일본의 정치 세력이 뿌려놓은 오래된 정치적, 사회적 바이러스"라고 말한다. 여기에 미국도 유럽도 감염돼 있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이 가장 깊게 감염돼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더욱이 서글픈 것은 한국인들이 한국과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대로 전달한다는 것"이라고.
바이러스는 저항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쉽게 감염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전파된다. 이 책의 목적은 혐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게 저항력을 기르거나 퇴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다.
책은 '혐한=일본 발 바이러스'라는 가설 아래, 그 정체를 추적해 밝히고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파하는 식으로 서술돼 있다. 1부('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타자')에서는 역사 속의 혐한의 원형을 살펴보고, 일본인과 일본 사회, 일본 문화의 심리적 기저를 탐색했다. 2부('혐한의 정치공학 : 재구성되는 근대의 조선멸시관')에서는 조선 멸시관과 정한론이 혐한이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3부(역사갈등 : 출구 없는 미로가 되기까지')에서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동아시아의 근대사와 역사 갈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일본 지배층이 혐한을 어떻게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를 살핀다. 또 일본의 지식인, 언론이 어떻게 혐한론의 공범이 되는지, 일본의 마구잡이식 주장과 한국 정부의 미숙한 대응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저자는 일본의 지배계급이 혐한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를 4가지로 꼽았다. 첫째, 역사성이다. 월남한 실향민이 저자의 부모가 골수 반공·반북 세력이었듯이, 일본의 지배세력이 백제 때 한반도에서 쫓겨난 세력이라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둘째, 지배계급이 국내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한데 한국이 그에 적당한 대상이란 것이다. 셋째, 역사적 근거, 즉 한국과 역사논쟁에서 질 경우 일본이 그동안 분식해온 역사 정체성,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넷째, 일본이 아시아 지역 강국으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을 항상 밑에 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사회에 퍼뜨리고 공유하는 정한론의 원형 텍스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다. 이는 일본의 역사책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얘기다. 이미 역사 학자들의 검증으로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일본 정치세력은 시대에 따라 신공황후 가짜 신화를 변주하며 혐한론, 정한론의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살포하고 있다.
특히,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일본이 '일본식 모방 오리엔탈리즘'으로 변조해 조선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불행한 것은 한국의 지식층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한탄한다.
예를 들어, '일본 근대화론'은 냉전시대의 도래에 맞추어 미국이 일본의 역사 반성을 면해주면서 일본이 마치 점진적으로 민주주의 방향으로 발전했고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로 이행했다고 포장해 준 논리였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학자가 이것을 빌려와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해 준 것처럼 써먹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을 겨냥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근대화론'을 '일본의 한국 지배 성과론'으로 재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이것 말고도 곳곳에 외교관의 통찰력이 담긴 통쾌한 지적이 나온다. 일본의 가장 큰 약점이 보편적 논리가 없고 상황 논리만 있다는 것, 그러니 한국과 과거사와 관련한 협상에서도 항상 애매모호하게 해놓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 미국은 아시아 정책에서 항상 한국보다 일본을 중시했다는 얘기는 여느 외교관한테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에 관해 불법인지 합법인지 애매하게 얼버무리고 도쿄 전범 재판 때는 재판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는 걸 결사코 막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은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불법이었다다고 판결함으로써 도쿄 전범재판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한 것"이라고 역사적 의미를 평가했다. 또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도 당일 일본의 외상이 합의를 부인하는 발언을 했는데도 외교부가 그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 것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을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외교관 경험자의 책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 책도 외교관의 가벼운 경험담을 담은 책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책장을 넘겼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나도 역시 그랬다.
이 책은 독서와 연구, 경험과 식견이 잘 어우러진 깊이 있는 일본 분석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집중해서 파고 연구하다 보면 갑자가 문리가 트일 때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경우가 그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을 깊게 알고 싶은 사람, 일본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은, 특히 한일 관계를 다루는 외교관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