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왜 독재자에 쉽게 굴복하나?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 사법부, 나치독일, 윤석열

by 오태규

요즘처럼 한국 시민이 판사와 사법부의 역할에 관해 큰 관심을 가진 적도, 그들을 불신한 적도 없었을 게다. 윤석열의 12.3 계엄령 발동 이래 조희대 대법원의 선거법 파기환송까지 근 5개월 동안 사법부는 국민적 관심과 불신의 정중앙에 있다.


우선 헌법재판소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파면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많은 시민이 불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일부 보수 재판관들이 작당해 윤석열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와중에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지귀연 판사가 '마법의 산술'을 동원해,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으로 시간 단위로 구속 시간을 계산해 윤석열을 '합법적으로 탈옥'시켜줬다. 거의 모든 시민이 경악했다. 헌재의 사보타주와 함께, 법원과 검찰 카르텔 집단이 내란을 은밀하게 지원한다는 의심을 부추겼다.


천신만고 끝에 헌재에서 만장일치로 윤석열이 파면되면서 한숨 놓은 듯했는데, 이번엔 조희대 대법원장이 주동이 돼 '사법 내란'을 일으켰다. 조희대가 이끄는 대법원 전원 합의부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선 후보 등록일 전에 전격적으로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동안 사법부의 움직임을 수상쩍게 지켜보고 있던 시민이 급기야 폭발했다. 내란 우두머리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게 풀어주고, 다가오는 대선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야당 후보를 법살하려는 꼴을 보고 '너희들도 내란 세력이구나'하는 비판 여론이 봉화처럼 일어났다. 시민의 저항과 사법부 안의 비판이 분출하면서, 조희대의 사법부가 후퇴하고 이재명 후보가 6.3 대선에 간신히 출마할 수 있게 됐다. 일견 사태가 진정된 것 같지만, 한번 불붙은 사법부 불신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훨훨 타오르고 있다.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판사들은 왜 불의와 타협하는가>(진실의힘, 한스 페터 그라베르 지음, 졍연순 옮김, 2025년 4월)는 사법부에 대해 의심을 품는 작금의 한국 시민의 의문에 답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마치 한국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책 출판 시기가 절묘하다.


저자 한스 페터 그라베르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법학 교수로, 노르웨이 과학·문학아카데미 회장을 지냈고 유럽 학술원 회원을 하고 있는 석학이다. 판사와 관련한 법 역사책을 다수 썼다. 옮긴이 정연순 씨는 민변 회장을 역임하고 제주 4·3사건 희생자 특별법 개정운동에 참여하는 등 인권 증진 활동을 정력적으로 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다.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은 판사와 사법부가 억압적인 정권에서도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독립성을 보장하고 많은 권한을 준다. 과분할 정도의 신뢰도 보낸다. 하지만 현실의 판사와 사법부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왜 판사와 사법부가 많은 사람의 믿음 그리고 정의와 인권을 배반하는지, 또 그런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판사 및 사법부 비판서다.


우선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오랜 기간 권위주의 체제에서 법원과 판사들이 수행한 역할을 연구해왔습니다.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전반적으로 판사들은 권력자의 관점에 순응합니다. 권력자들이 법을 통해 억압을 강화할 때뿐 아니라 그들이 법을 무시하는 때에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권력자의 도구가 돼 법치주의를 해체하는 데 가담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권력자의 편에 서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 판사와 권력자는 동일한 사회집단에 속하며, 정권에 맞서려는 판사는 종종 사회적 직위와 경력을 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9쪽)


"권력자들은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중략> 자주 사용하는 방식은 충성스러운 판사들로 최고법원을 구성하거나 다른 수단을 통해 최고법원을 장악하는 것입니다."(9쪽)


저자의 한국판 서문에 나오는 이 두 단락만 읽어봐도, 지금의 한국 판사와 사법부가 왜 정의와 인권의 편에 서지 않고 권력자의 편에 서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권위주의 통치자가 법원을 억압 수단으로 어떻게 사용하고 판사가 그에 어떻게 순응하는지, 그리하여 사법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국가 억압의 일부로 변모하는지 살펴본다. 나치 독일과,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유럽, 아파르헤이트의 남아공, 라틴아메리카 독재국가의 사례가 자세하게 나온다. 순응뿐 아니라 저항하는 일부 용기 있는 법관의 얘기도 나온다.


2부는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에 가담한 판사의 책임 문제를 다룬다. 역사적으로 판사들이 법정에서 저지른 악행으로 책임을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판사의 책임을 물은 경우는 나치 정권 붕괴 뒤의 전범 재판과 독일 통일 뒤 동독의 재판관들을 처벌한 재판 둘뿐이다. 남아공과 칠레의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법부를 다루긴 했지만, 판사들은 약간의 비판 외에는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의 채택(1998년 채택, 2002년 발효) 이후부터는 판사가 단지 국내법을 적용하고 집행했을 뿐이라도 면책되지 않고, 대량학살과 인류에 대한 범죄를 범하면 유죄 판결을 받게 됐다고 말한다. 앞으로 이것이 판사의 책임을 묻는 기준이 될 것이고 돼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3부에서는, 왜 판사들이 억압적인 체제의 악행에 가담하는가를 법 이론을 통해 검토한다. 법실증주의, 단순 사실 접근법, 차악 선택의 논리 등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법적 방법론과 법을 통해 억압에 가담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연관성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판사는, 특히 입법자가 법치주의에 맞서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판사는 단지 '법률을 준수하는 것' 이상의 폭넓은 선택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도덕적으로 결단하고 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법 이론의 뒤에 숨지 말고 자신의 양심을 걸고 억압에 동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인 옮긴이의 '역자 후기'는 이 책의 결론으로 삼기에 적절하다.


그는 "판사들이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취하지도 않고, 오로지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하나의 해결책을 해답을 얻을 수 없다'라고 전제한 뒤, “법률이 정한 추상적 요건과 법 이론에만 매몰되어 구체적인 인간적 상황과 판결이 현실에서 가져올 결과를 무시하는 법 기술자”로 남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판사를 양성하는 교육, 문화, 윤리와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를 듯한 오늘날, 한국의 판사와 사법부가 정의와 인권의 수호자라는 평판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정의를 배반하는 사법부에 분노하는 시민뿐 아니라, 재판에 직접 관여하는 법조인들이 꼭 읽어보고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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