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토 타쿠미의 사진집 <과묵한 공간>
최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노트북과 지내는 시간도 늘었다. 인터넷 화면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사진작가 후지모토 타쿠미씨가 11월 12일부터 12월 4일까지 오사카문화원에서 '사진활동 50주년 기념 순회특별전'을 한다는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후지모토 타쿠미씨는 한일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 낯선 인물이 아니다. 나와 같이 사진 문외한은 오사카총영사로 부임해서야 비로소 그의 명성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후지모토씨는 1970년 처음 한국에 와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 이제까지 줄곧 50년 이상 한국을 주제로 한 사진을 줄곧 찍어온 중견 사진작가다. 그의 아버지가 식민지시대에 조선총독부의 산림기사로 일하면서 한국의 민예를 발굴해 소개한 아사카와 타쿠미(1891-1931)에서 '타쿠미'라는 글자를 따와, 그의 이름에 붙여줬다고 하니 그의 한국 사랑은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번에 여는 특별전시회의 제목도 '아사카와 타쿠미가 사랑한 한국과 민예'다. 아사카와씨의 이름을 빌려 '후지모토 타쿠미가 사랑한 한국' 50년을 결산하고 싶은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하고, 내 멋대로 상상해봤다.
후지모토씨는 거주지가 오사카여서, 나도 오사카에 있는 동안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의 온화한 얼굴에서 금세 '한국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지난해 일본에서 사진 분야의 최고상인 제39회 도몬케상을 수상했다. 한국에 이주했던 일본인 어부들의 마을 풍경과 옛 소록도갱생원(국립소록도병원) 하나이 젠키치 원장의 흔적을 더듬은 사진집 <과묵한 공간-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어민과 하나이 젠키치 원장>(공방 초토사, 2019)이 수상작이다.
내가 총영사로 재직했던 때인 11월 6일부터 12월 19일까지 도몬켄상 수상 기념 전시회가 오사카문화원에서 열렸다. 코로나 감염 사태가 한창일 때이지만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고 전시회를 하기가 서운해, 아주 작은 규모로 개막식을 했다. 그런데 내가 이 개막식 인사말에서 '작은 실수'를 했다. 문학에서 '아쿠타가와상이 유명한 것에만 착안해, 문학의 아쿠타가와상에 해당하는 도몬켄상을 수상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후지모토씨에게 물어보니 아쿠타가와상은 신인한테 주는 상이니까 비유한다면 중견작가에게 주는 나오키상이 맞다고 말해 줬다. 개막식 인사말에서는 고치지 못했지만, <오사카통신>에 쓸 때는 나오키상으로 고쳐 썼다. 더 나중에 김시종 시인의 책을 보면서, 아쿠타가와상이 당시 조선문화 말살정책과 관련한 사람들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무식이 죄'라는 사실을 통감했다.
<과묵한 공간>은 A4용지 크기로 3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사진집이다. 당시 후지모토씨한테 받아서 한 번 쓱 훑어본 뒤 책장에 꽂아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다시 꺼내 꼼꼼하게 살펴봤다. 사진의 질이야 도몬켄상을 탄 전문작가이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가 뭐라고 평가할 자격이 없다. 다만 모두 흑백사진으로 찍은 풍경이 아득한 과거를 묵중하게 되살려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진보다 내가 더욱 흥미를 끈 것은 취재기였다. 취재기를 읽으면서 그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마나 자료조사를 치밀하게 하고 공을 들여 오지까지 발걸음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다닌 한국의 어촌은 모두 부산과 경남, 전남 연안에 있다. 일본의 어부가 건너와 살려면 고향과 가까워야 할 테니 그쪽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한국에 와서 사라진 일본인 어부들의 생활 흔적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마치 사회부 기자를 연상시킨다. 택시운전사, 마을노인, 마을유지 등에게 말을 걸면서 단서를 얻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기자를 해도 아주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일본 어부마을만 찾아간 것이 아니라, 원래 일본어부들이 살던 고향까지 가서 흔적을 사진에 담았다. 그 가운데 한일 양쪽의 마을을 연결하는 흔적이 '신사'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역시 종교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나오는 소록도병원 장면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촌 마을 풍경과는 주제가 다소 어긋난다. 하지만 이 부분의 취재기가 가장 감동적이다. 2대 원장이었던 하나이 원장은 강압적인 초대 원장과 달리, 환자들을 식구처럼 대하는 등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가 원장 때인 1929년 숨지자, 환자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30년에 병원 안에 창덕비를 세웠다. 그리고 해방 뒤 이승만 정권이 일본인 창덕비를 전부 철거하는 정책을 취하자 환자들이 창덕비를 땅 속에 묻어 감췄다. 이 때문에 아직도 그의 창덕비가 살아남아 소록도에 서 있다. 이 후기를 읽으면서 후지모토씨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