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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Feb 07. 2021

나를 설레게 한 그림


잊혔던 기억이 '번쩍'하고 떠오를 때가 있다.


얼마 전 책을 보다가 매력적인 그림을 발견했다. 존 러스킨이 그린 그림이었는데 회색 톤으로 표현한 벨벳 크랩을 본 순간, 10여 년 전 좋아했던 그림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좋아했던 그림도 게 그림이었어. 완전히 잊고 있었다니!'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하던 시절, 종종 미술관에 가곤 했었다. 유명 미술관이 대부분 무료로 운영되는 터라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등을 들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특히 내셔널 갤러리는 런던 중심가인 트라팔가 광장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이리저리 버스를 타고 가다가 즉흥적으로 내리기 좋은 위치였다.  


트라팔가 광장 벤치에 앉아 있으면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광객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자상에 올라타려는 재기 발랄한 학생 무리부터 다정한 노부부의 뒷모습,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남기는 대가족, 무료한 오후를 조용히 보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는 곳. 느릿하게 사람 구경을 하며 채워가는 행복감이 좋았다.


미술관 입구에서 짧은 눈인사를 건네는 데스크 직원을 지나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오늘 안에 미술관을 모조리 봐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없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방으로 향한다. 섬세한 붓터치와 점진적으로 하나의 톤을 묘사하는 색을 쓰는 방식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래 그림을 그렸지만 입시 미술의 위한 과정에 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늘 동경하는 장르로 마음에 남은 터.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직접 실물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늘 진폭이 컸다.

Photo by Zalfa Imani on Unsplash

인상파 화가의 방에는 여러 화가의 그림이 많았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림을 감상하는데 어느 날 유독 끌리는 그림을 발견했다. 붉은 톤의 게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색감이 좋아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림. 다른 정물 없이 '게'만 배치한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색 묘사 방식이 아름다웠다. 그 후로 그림을 보러 종종 들르곤 했다.


그렇다. 바로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자. 러스킨의 그림 한 장이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아마, 처음에는 작가와 제작 연도 등을 기억했을는지 모른다. 그 후에는 가만히 서서 그림만 보고 오는 날들이 이어졌을 테고. 작가 정보는 현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감흥의 잔상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는 어렴풋이 걱정했던 것 같다.


'유명 미술관은 소장품이 많아서 주기적으로 그림을 바꿔 전시한다는데 훗날 런던에 들렀을 때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당분간 런던행은 그림의 떡이니 이번 기회에 찾아보자 싶었다. 구글에서 'national gallery crab'이라고 다.


와우! 1초 만에 결과가 나왔다.


Vincent van Gogh | Two Crabs | L995 | National Gallery, London

Date made: 1889

Location: Room 43


반 고흐였다니! 게다가 이렇게 쉽게 찾다니. 의외의 결과에 놀랐고 발품 팔지 않아도 이토록 빨리 검색이 된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그는 대표적인 인상파였으니 속 그림이 맞을 테다.


당시의 기억을 복원해서 감사했다. 그림을 못 볼까 염려했던 어린 날의 생각은 기우였다. 다시 런던을 찾는다면 그때처럼 성큼성큼 내셔널 갤러리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고풍스러운 액자의 향연 속으로, 온갖 색감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43번 방으로 곧장 향할 것이다.


나를 홀연히 빠지게 했던 과거의 시간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부풀어 온다. 그림과 나 사이에 설렘 한 자락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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