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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May 17. 2021

누군가에게 천사였던 날



겨울의 기운이 조금씩 엄습하던 11월 중순, 강남역의 어느 회사로 출퇴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신분당 환승로 근처의 지하상가를 거쳐야 출구가 있었기에 하루에 두 번 그곳을 지났다. 출구로 가는 길에는 음식점과 옷가게, 화장품 가게가 즐비했고 매일 보는 풍경을 반복적으로 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야트막한 계단 가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몸집이 아주 작고 옷매무새가 단정했던 할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셨다.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어떤 호객 행위도 없이 아주 얌전히. 할머니 앞에는 몇 종류의 껌이 놓여있었다.

바삐 제 갈길을 재촉하며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감이 무색하게 오도카니 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단연 눈에 띄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졸고 계시던 몇 날, 앞만 보던 눈길을 몇 날. 그렇게 할머니를 스쳐갔다.


껌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평소에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니다 보니 멈추어 설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패딩 주머니에 지폐가 만져졌다. 세어보니 5천 원. 그날 퇴근길에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껌을 골랐다. 지금은 잘 씹지 않는 다소 올드한 브랜드의 껌 속에서 고민하다 풍선껌을 집어 들었다. 5개를 받아왔던 것 같다.

값을 치르고 일어나려니 할머니가 순한 눈빛으로 뭐라 말씀하신다.

"네?"

잘 안 들려서 할머니에게로 몸을 가까이 대니

"천사야. 천사 같아."

나와 눈을 마주치시고는 작고 나지막하게 내뱉으셨다.


지하철로 향하면서 마음이 몽글몽글 이상했다. 집에 와서 선반 위에 풍선껌을 하나씩 놓으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 저릿하게 올라오는 이 감정은 뭘까? 5천 원을 내고 몇 개의 껌을 사 왔을 뿐인데 그 순간 천사가 되었다니.


팔십은 훌쩍 넘으셨을 듯한 할머니의 자그마한 몸집, 쇼트커트에 새하얗게 새어버린 빛깔, 언제나 단정한 차림으로 흐트러지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서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었다. 우리 할머니도 저분처럼 몸이 점점 작아지셨지. 어쩌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하루를 매일 보내시는 걸까? 가족은 없는 걸까? 실례가 될까 싶어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천사라는 호칭을 들은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 그 후로 몇 주간 천사로 살았다. 껌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두 해가 흘렀다. 회사의 프로젝트는 끝이 났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 지하상가를 들를 일도 없었다.

한가한 어느 주말 오후, 인스타그램을 보다 '강남역 껌 할머니'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보였다.

'혹시 그 할머니?'

부고 소식이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지나갔을 그 장소, 오도카니 계단가를 지키던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가 많았던지 각각의 추억이 댓글을 타고 전해졌다. 앉아계시던 계단가에는 국화 송이와 하얀 장미가 비스듬히 줄지어 있었다. 날짜를 보니 작년 12월에 돌아가셨나 보다.


단 한 번의 인연이었지만 할머니를 기억하던지라 눈을 감고 묵념을 드렸다. 평안하시길 바라며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가 계셨던 자리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짧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자리를 메우고 있어서겠지.  마음들이 전해졌길 바라며 할머니의 천사였던 나도 마음을 보탰다. 아마 천사 칭호를 받은 많은 영혼이 할머니의 명복을 빌어드렸을 테다. 하늘에서는  자리에 오래 물지 마시고 좋은  마음껏 돌아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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