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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Feb 04. 2021

지갑 없이 한 달을 살아 보니


지갑이 나에게서 도망쳤다.


약 5주 전인 연말, 감쪽같이 지갑이 사라졌다. 어디서 잃어버린지도 모른다. 며칠간 '집 - 회사'만 왔다 갔다 했고 어디 다른 장소에 들른 적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장소는 10분 간 이동했던 버스 안,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었던 약 100m가량의 밤거리, 그리고 패딩을 걸어뒀던 회사 내 행거 정도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누구를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


월요일 오후에 부랴부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꼭 필요한 카드 2장이 며칠 후 집으로 배송되었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지갑 없이 한 달 하고도 일주일째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허탈했는데 담담해졌다. 몇 년에 한 번씩 아끼는 물건이 나를 떠난다. 사소한 것이면 좋겠지만 꼭 아끼는 옷이거나 지갑 등 의미가 큰 물건인 게 문제이다. 엄마는 평소엔 안 그런데 한 번씩 덤벙댄다고 구박하시는데 이번에도 미스터리라며 혀를 끌끌 차신다. 기억나지도 않는 고등학교 때 지갑 잃어버린 얘기까지 꺼내시면서. '하.....'  사라진 지갑들이여.

Photo by Mason Supply on Unsplash

체크카드 1장, 신용카드 1장, 몇 천 원과 동전 몇 닢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외출할 때 지갑과 핸드폰을 꼭 챙겨야 마음이 놓이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대신 신분증이 없는 것은 불편했다. 비행기를 타지 못했고 인터넷에서 회원가입을 할 때 신분증 발급 날짜를 요하는 항목에서 막혔다. 일전에 경찰서에서 재발급한 운전 면허증을 찾으려 했더니 신분증이 있어야 했다. 신분증 없이 확인 가능한 방법은 지문인식인데 그 경찰서에는 지문인식 기계가 없다고 했다. 민증 재발급을 바로 신청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하릴없이 한 달간 지갑과 신분증 없이 지냈다.


며칠 전에 달콤한 휴가가 주어져 주민센터에 가서 민증 재발급을 신청했다. 신청확인서를 받은 후에야 현재 필요한 온라인 서비스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제 하나씩 잃어버린 것들을 복구해가야 할 타이밍. 분실 목록에 있던 은행 카드를 재발급 신청했고 예약을 걸어둔 책이 도착하면 도서관 카드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통신사 할인 카드, 각종 적립 카드는 차차 만들어야지.(요즘은 앱으로 바코드를 찍는 게 익숙해졌다).


사실 지갑 안 보유 내역이 모조리 기억나지 않는다. 돈이 얼마큼 있었는지, 쓰지 않은 상품권을 꽂아둔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다. 큰 액수는 아닌 것 같고 이래저래 합치면 5만 원가량 되려나.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건 좋아하는 브랜드의 지갑인데 5년 간 충분히 사용했더니 후회가 없다. 사용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두어 개 있어서 슬슬 지갑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이런 마음을 눈치채고 가출한 걸까? 상상의 나래가 더해진다. 물건도 애정이 다한 주인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런 기운이 물건 속에 스며드는 건 아닐까. 

'아, 이 책은 보낼 때가 된 것 같은데..' 할 때면 중고책 주문 알람이 들어와 뜨끔하며 놀라곤 했다. 슬슬 이 옷들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즈음,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폭우에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의류 박스가 침수된 걸 발견한 적도 있다. 열어보니 곰팡이가 심하게 슬어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절묘한 우연이 신기하기도 하고 후련한 기분 끝에 미안한 마음이 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분실인지 도난인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있지만 어차피 잃어버린 거 깔끔하게 보내자 싶다. 앞으로 지갑을 복구하는데 시간과 품이 더 들것이다. 지갑 속 물건이 나를 대변할 순 없지만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니 무리 없이 생활이 가능하도록 되돌려놓아야지. 신분증과 카드는 곧 복구될 테고 새 지갑을 고르는 일만 남았다. 음... 한 번쯤 빨간 지갑을 사보고 싶었는데 이번 참에 골라볼까나. 

디자인과 재질, 가격, 기능을 따져 최적의 지갑을 고르고 싶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싶다. 외출이 조심스러운 시기 쇼핑을 무람없이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어머, 이건 꼭 사야 돼.'라고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잇템을 고를 수 있을지. 유심히 찾아보고 없으면 직접 디자인해서 주문 제작을 맡겨볼 생각이다. 그때까지 지갑 없는 홀가분함을 누리면서 새 지갑을 향한 설렘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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