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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Jul 29. 2020

옷장 없이도 행복한 이유

패션 에디터에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 중입니다


옷을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여보고 싶어서 옷장을 사지 않았다. 대신 이사 올 때 가져온 이동형 행거에 옷을 걸어둔다. 보통 한 두 계절의 옷을 걸어두곤 하는데 나머지 계절의 옷은 어디에 보관할까? 옷방에는 어떤 수납장도 없다.


바로 여행용 캐리어이다. 옷장도 수납장도 없으니 활용할 수 있는 건 이동식 보관함뿐. 캐리어야말로 제격이었다. 현재 26인치, 23인치, 20인치 캐리어를 보유 중이다. 그중 하나는 동생이 두고 간 거라 여유공간으로 활용하기 좋았다. 나머지 캐리어도 1년 중 사용하는 날보다 비어있는 날이 몇 배는 많으니 놀리지 않고 옷 보관용으로 사용한다. 겨울옷은 큰 캐리어에, 얇은 옷은 작은 캐리어에 알맞다.

Photo by Alex Holyoake on Unsplash


처음에 임시방편으로 택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사용하다 보니 편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단단한 외피 덕에 습기와 벌레를 막아준다. 혹시 몰라 옷 사이에 습자지를 몇 장 끼워두었는데 사실 그 전에도 별 이상은 없었다. 평소에는 베란다에 보관하다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열어젖히는데 캐리어와 행거의 옷을 서로 맞바꿔주기만 하면 되니 간편 그 자체. 내 옷의 양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는 점도 캐리어 옷장의 장점이다. 펼쳤을 때 한눈에 옷을 볼 수 있으니. 여행 짐을 싸 본 사람은 알겠지만 캐리어는 용량이 분명하다. 요리조리 잘 배치하고 꽉꽉 눌러 담으면 보관 용량을 10~15%가량 늘릴 수 있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면 더 이상 닫히지 않는다. 계절별 옷의 적정량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옷을 향한 욕망보다 캐리어의 용량에 맞추는 삶에 적응이 되어 간다.


작년,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 말 즈음이었다. 여름옷을 완전히 결별할 시기, 세탁한 옷을 모조리 모아놓고 23인치 캐리어를 펼쳤다. 얇은 외투와 카디건, 최근까지 입은 여름옷 등을 접어 하나씩 개켜 넣는다. 십여 분 후,  옷을 다 넣었더니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 여름옷이 다 들어가는 게 아닌가! 얇은 옷을 3등분으로 접어 착착 세워 넣었더니 충분했다. 캐리어를 들었더니 무게까지 가뿐. 두 계절의 옷이 하나의 캐리어에 들어가는 느낌이 최고였다.


캐리어 옷장은 옷을 솎아내 정리할 때도 편하다. 캐리어를 양 옆으로 쫙 펼친 후 더 이상 입지 않는 옷, 낡은 옷을 쏙쏙 골라내면 된다. 보통 묵은 옷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방바닥이 옷으로 뒤덮이는 경우가 많다. 서랍과 옷장 깊숙이 숨어 있던 옷을 한가득 꺼내면 수북한 옷더미를 이루는 광경을 심심찮게 본다.

내 경우엔 숨어있는 옷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캐리어를 펼치면 소유한 옷이 모두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옷은 어디에도 없다. 행거에 걸려 있거나 계절별 캐리어 안에 위치한다. 옷이 숨거나 증식할 수 없는 환경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한때는 옷장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걸 알면서도 얇은 세탁소 옷걸이에 빽빽하게 옷을 걸며 살았다.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기 전 수납공간을 과신하며 살던 때이다. 옷장 안에 억지로 옷을 욱여넣었고 얇은 옷은 파묻혀 안 보일 때가 많았다. 당연히 외출할 때마다 옷을 찾는 시간이 지금보다 몇 배는 걸렸다. 묻힌 옷은 주인의 눈에 띄기 힘드니 세상 밖으로 몇 번 나오지도 못했다. 이제는 입는 옷 위주로 가짓수를 대폭 줄였다. 한결 여유로운 기분으로 옷을 고른다. 한 번씩 옷장을 뒤집는 수고로움 없이 계절을 맞는다.


이 간편한 기분을 쭉 유지하고자 앞으로도 신중하게 옷을 들일 예정이다. 동시에 입지 않는 옷을 과감하게 들어내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옷이 하나도 없는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

단 하나도 마음에 안 드는 옷이 없는 상태, 나의 스타일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최적의 옷으로만 살아가는 때가 오겠지. 그 날을 기대하며 불굴의 다짐을 더해간다.





위 포스팅은 2020.08.03일 브런치 추천 콘텐츠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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