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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Aug 03. 2020

옷 잘 입는 세 가지 방법

패션 에디터에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 중


한 달에 수만 벌의 옷을 다루던 삶에서 수십 개의 옷이면 족한 미니멀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대략 10년이 걸렸다. 어떤 분야든 극단을 경험하면 건너편 극단으로도 갈 수 있는 법이다.

현재는 미니멀리스트이지만 한때는 맥시멀리스트를 동경하며 새 옷의 증식에 행복한 때가 있었다. 패션 매거진에서 인턴 에디터를 막 시작한 사회 초년생 시절이 그랬다. 6개월의 인턴 기간 동안 많은 옷을 경험했고 쇼핑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옷 입는 감각이 몇 배로 늘었다. 학생 때만 해도 나만의 스타일이 없었던 나, 어떻게 단기간에 이런 결과를 얻었을까? 세 가지 방법을 꼽아본다.



첫째, 많이 접하고 입어보기

잡지에 실리는 촬영 아이템을 위해서는 매달 각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수백 여개의 룩북을 보며 수만 개의 옷을 훑는다. 각종 패션 대행사, 편집숍, 백화점 등에서 테마에 어울리는 옷을 찾아내야 하므로 시선에 닿는 옷은 더욱 늘어난다. 이전보다 접하는 양이 100배 이상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옷을 볼 때 형태, 색감, 스타일을 조합하는 감각이 늘 수밖에 없다.


특히 촬영 테마에 맞는 옷의 느낌을 보기 위해 우드락 판 위에서 스타일링을 맞춰보거나 행거에서 상하의를 대보며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는 것은 필수이다. 사수가 모델 화보를 준비할 때면 판단을 돕기 위해 피팅 모델 역할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입기 힘든 각종 브랜드의 실루엣과 소재 등을 유심히 살피며 특징을 익혀 나갔다.

Photo by Christian Wiediger on Unsplash

한편 보고 배우는 동시에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위한 쇼핑에도 매진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한 한 달 간의 여정은 PDF 파일이 인쇄소로 넘어가는 마감일이 종착지다. 마감을 끝내면 다음날은 꿀맛 같은 휴식이 주어지는데 밀린 잠을 실컷 잔 뒤 옷을 사러 가곤 했다. 스스로에게 주는 달콤한 보상이자 위안.


잡지를 만드는 본격적인 기간은 3주인데 대개는 야근이 2주 이상 이어진다. 마감 직전 열흘은 밤샘 많아 마감이 다가올수록 체력과 정신력은 한계치에 이른다. 지리한 레이스의 끝. 기분을 전환하며 다음 달을 세팅하는 출발점에 쇼핑이 있다. 나에게는 강력한 진통제이자 포기할 수 없었던 매달의 의식이었던 셈이다.


100m가량 늘어선 학교 앞 옷가게 골목을 따라 모든 매장을 둘러본다. 요리조리 한 벌을 구성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면 구두나 가방, 귀걸이에 눈길이 간다. 반나절 동안 샅샅이 돌고 돌았다. 하루에 수십 번 옷을 입고 벗으며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 헤맸다.

촬영 준비하는 막간에 신발을 신어보거나 액세서리를 걸쳐보는 건 슬쩍슬쩍 할 수 있지만 옷을 입어보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일. 선배가 피팅을 부탁할 때만 입었으니 이 날이야말로 내 옷을 마음껏 입는 날.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골목을 유영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규칙적으로, 집중해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선택하는 과정이 옷 입는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옷을 구매한 나날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규칙적으로, 집중해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민하고 입어본 뒤 선택하는 과정이 옷 입는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음을 훗날 알게 되었다.


잡지 촬영을 위한 옷을 스타일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이자 지점. 남을 위한 감각과 나를 위한 감각은 엄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고 모두 패셔니스타는 아니다. 패션 에디터라고 해서 모두 영화 속 인물들처럼 패셔너블하지 않다. 옷은 어쨌든 입어봐야 제대로 고를 수 있음을 쇼핑을 통해 철저하게 깨달았다. 나의 스타일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옷 입기를 시도하며 내게 맞는 옷과 맞지 않지 옷을 분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때의 나는 마감 후 쇼핑에 몰입하면서 그 과정을 반복했고 내게 어울리는 옷을 서서히 감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척하면 척, 고수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많이 보고 접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길이 실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어떤 분야든 단기간에 압도적인 양으로 승부하면 보는 눈이 트인다.



둘째, 피드백은 다방면으로 얻고 반영할 것

옷을 많이 보고 매달 구입했지만 내게 정말 어울리는지 판단하려면 주위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가까운 이들의 피드백이야말로 자신의 스타일을 점검하고 발전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기 때문.


마감 다음 날은 대체로 평일이었기 때문에 함께 갈 친구가 마땅치 않아서 주로 혼자 쇼핑을 했다. 전 세계 어느 매장이든 직원들의 눈에는 다 예쁘다. 그러니 솔직한 평가는 내 주변에서 듣는 게 정확하다. 다행히 나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패션디자인과 동기들, 새 옷을 사면 서로 보여주기 바빴다. 반응이 좋지 않으면 재빨리 반품할 수 있었다. 또한 촬영장과 회사를 오가는 동안 옷차림에 관한 반응을 수시로 들었다. 패션 에디터, 포토그래퍼, 헤어 및 메이크업 아티스트, 모델 등 모두 패션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감상이니만큼 솔직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재킷 독특하고 예쁘네요.”

“요즘 그런 귀걸이가 유행인가 봐요. 잘 어울려요.”


어렵지만 따뜻했던 편집장님과 본부장님이 지나가며 칭찬할 때면 그 날 하루는 더 신나게 일했다.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들은 대개 빈말보다는 툭 던지는 말로 진심을 건넨다.


"너는 참 예쁜 구두가 많구나. 그런 건 어디서 사니?"

“확실히 핑크색이 너한테 받아. 어제 다홍색보다 얼굴이 환해 보여.”


복도에서 마주친 선배의 지나가는 말이, 밥 먹다가 문득 건네는 동료의 한 마디가 어울리는 옷을 여과하는 소중한 피드백이 되었다.


"옷 잘 입는 사람이란 타이틀은 다른 이의 반응과 평가로 완성된다"


주변 반응과 상관없이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싶은 이도 있겠지만, 호평이 듣고 싶다면 주변 피드백을 귀담아듣고 스타일에 반영해 보기를.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쌓 스타일이 형성된다. 옷차림을 훑는 시선과 옷을 향한 칭찬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스타일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옷 잘 입는 사람이란 타이틀은 다른 이의 반응과 평가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셋째, 한정된 예산으로 트레이닝할 것

옷을 구매할 때 예산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쇼핑을 하는 편인가? 아니면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옷이면 사는 편인가?

나는 가격 상한선을 둔다. 상의 및 하의는 5만 원, 외투는 15만 원, 구두 및 가방은 30만 원 선이다. 가격대가 나가는 겨울 외투, 하이엔드 브랜드는 간혹 예외를 둘 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위 상한선을 넘지 않는다. 이 습관은 가장 많은 옷을 샀던 이 기간에 정착된 것이다.

Photo by NORTHFOLK on Unsplash

당시 인턴 월급이 적었기 때문에 과소비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매달 옷을 사려면 스스로 예산을 정해야 했다. ‘최대 30만 안에서 마음껏 쇼핑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 예산으로 다양한 옷을 사려면 브랜드 옷보다는 보세 골목을 훑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패하는 옷의 확률을 줄이려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지 않고 골목을 모두 둘러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우선순위를 매긴 후 고심 끝에 구매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운 옷으로 기분전환을 하고 싶으면 저렴한 가격대로 맞춰 한 벌로 스타일링이 되게끔 했고 가격대가 나가는 액세서리가 더 끌리면 옷은 포기하더라도 그 달에는 구두만 구입하는 식으로 타협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만족도를 높이려면 매의 눈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상한선이 30만 원일뿐, 매달 예산을 꽉꽉 채워 쓸 수는 없으니 되도록 예산은 적게 쓰고자 했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디자인을 고르는 촉수가 곤두선다. 명품같이 보이는 1~3만 원 대의 옷을 고르는 안목을 길러갔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최적의 옷을 고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소재와 디자인을 선별하는 능력이 생긴다"


‘30만 원으로 6개월 연이어 쇼핑하기’는 합리적 소비의 기틀을 다지게 했다. 옷을 사더라도 과소비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다른 생활비에서 곤란을 겪지 않았고 패션 에디터가 빠지기 쉽다는 무분별한 쇼핑 중독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6개월 간 적응했더니 브랜드 옷은 거의 사지 않고도 저렴한 가격대에서 숨은 보석 같은 옷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확고한 안목이 생기면 옷을 고를 때 기준이 브랜드가 아니라 디자인, 소재. 색감, 실루엣 등 옷 자체로 옮겨간다. 또 하나의 소득이다.

Photo by Morning Brew on Unsplash

한 달에 한 번, 6개월 동안 입고 싶은 옷을 산 내 인생 최대의 쇼핑 중독이었지만 얻은 것이 많았다. 먼저 쇼핑 욕구가 한층 사그라들었다. 질릴 만큼은 아니더라도 원하는 옷을 최대 예산 안에서 실컷 사본 경험을 하고 보니 예전만큼 쇼핑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셀프 미션을 한 덕에 패션 감각도 대폭 늘었다. 20대에 소비 욕망을 조절하는 법과 평생 써먹을 능력을 동시에 얻은 것이다.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 환경이 플러스 알파로 작용한 점도 있지만 위 세 가지 방법은 누구든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온오프라인 할 것 같이 옷이 지천인 시대,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을 충분히 훑으며 많은 옷을 입어보는 경험은 마음만 먹으면 시도해볼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옷을 주어진 예산 안에서 선별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옷을 보는 눈이 생긴다. 아, 가까운 이를 대동하고 조언을 새겨듣는 것도 잊지 말자. 감각 있는 지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고.




위 포스팅은 2020.08.03~04일 Daum 스타일의 메인 콘텐츠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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