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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Aug 04. 2020

비움 일기 효과

패션 에디터에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 중


옷-책-자료-소품-추억의 물건 순으로 1차 비우기를 몇 개월에 걸쳐 단행하고 몇 박스를 비워냈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서 못 버린 물건이 많았다. 쓰지 않은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상태가 멀쩡해서, 나를 생각한 정성이 담긴 선물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좋아한 사람과의 추억이 발목을 잡아서 등 버리지 못한 수많은 이유를 양산해 냈다. 찔끔찔끔 버리다 안 되겠다 싶어 블로그에 비움 스토리를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미니멀 라이프 폴더를 만들어 그간 비워냈던 이야기, 연말 쇼핑 결산 등을 공유했다. 사람들이 꽤 많이 찾아왔다. 블로그 방문자가 하루에 200명을 돌파한 시점도 이 폴더가 생기고부터였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3월, 묵은 겨울옷을 정리하며 ‘봄맞이 옷 비우기’ 편을 올렸다. 못 버리던 가방과 옷 사진을 찍고 이에 얽힌 추억을 적어나갔다. 이 후로 계절이 크게 바뀔 때마다 비운 물건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옷뿐 아니라 오래 사용한 그릇도 있었고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추억의 선물도 있었다.

 

미니멀 라이프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내 물건을 향한 집착을 놓는 게 가장 어렵다. 조금만 신경 쓰면 중고 사이트에 내다 팔거나 얼른얼른 정리해 공간을 더 넓힐 수 있는데도 귀차니즘이 발동할 때가 많다.


한 두 달마다 올리는 비움 스토리는 그런 면에서 나를 일으키게 했다. 폴더를 만들어 두었으니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내보내야 했고 이웃이 늘면서 ‘댓글’과 ‘좋아요’가 많아졌다. 달콤한 응원 열매를 하나씩 먹는 기분이랄까. 아직 갈 일이 먼 데도 ‘대단하세요. 저는 생각만 하고 못 비우고 있는데 본받아야겠어요.’(앗, 나도 애송이인데 이웃님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겠군.), ‘짐이 한가득인데 저도 하나씩 버려봐야겠어요.’(포스팅을 보고 버리는 마음을 다잡는 분도 계시네. 나도 안 버릴 수가 없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분, 비우기에 용기를 얻는 분, 비운 과정에 공감하는 분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Photo by Gary Chan on Unsplash

 

물건에게 쓰는 짧은 편지를 쓰기도 하고 기억 저편에 있던 추억을 기록했다. 물건이 떠나면 기억도 사라질 것 같았는데 쓰고 나니 안심이었다. 곤도 마리에는 물건과 작별할 때면 ‘아리가또’라고 말하고 비운다. 이에 착안해 나도 비울 때마다 “고마웠다.”하고 톡톡 인사를 건넨 뒤 보냈다. 잘 쓴 물건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재활용될 물건에게는 좋은 새 주인을 만나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훌훌.


2년 여 시간 동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움 리스트를 작성했다. 100개가 넘는 물건이 내 곁을 떠나갔지만 한 번도 아쉽거나 다시 찾은 적이 없다. 결국 오랫동안 쥐고 있던 집착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블로그에 꾸준히 올리는 비움 기록.


틈틈이 비울 때마다 기억하고 싶은 물건은 사진을 찍어둔다. 일정 기간 모아뒀다 한꺼번에 비움 스토리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휘서님, 비움 얘기 잘 읽고 있어요. 은근히 기다려져요.’라고 말씀 주셔서 깜짝 놀랐다. 개인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기다리는 콘텐츠라니. 만인에게 공유한 효과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포스팅의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참 좋다. 어느새 계절별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글은 보통 이런 말로 마무리를 맺는다. ‘비움을 하기 전에는 집착을 놓는 것이 참 어려웠는데 하고 나면 참 홀가분해요, 이 과정이 좋아서 계속 비우게 됩니다.’라고. 비우기 전에는 세상 귀찮은데 막상 비우고 나면 이 느낌이 좋아서 또 비우고 싶어 진다.


물건은 사라져가지만 신기하게도 오히려 생생해진다. 사진과 이야기로 온라인에 남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이들의 사랑까지 받는다. 소유하고 있을 때보다 더욱 초연한 존재로 살아 숨 쉰다. 이야기가 늘어갈수록 나는 점점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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