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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Aug 08. 2020

가장 나다운 물건은 무엇인가요?

패션 에디터에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 중


어느 날 밤 여지없이 책장을 넘기다 문득 ‘요즘 내가 필요한 건 포스트잇과 필름뿐이구나.’란 생각이 스쳤다. 그만큼 딱히 새로 들이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미니멀리스트로 살다 보니 집안이 점점 간소해진다. 짐을 늘려가기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이렇게 점점 비우다 보면 과연 몇 개의 물건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날이 많았다.


그즈음 영화 한 편을 보았다.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 찾기>란 독일 영화로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획기적인 앱을 개발한 두 남자 주인공은 축포를 터뜨리는 파티에서 그만 술에 잔뜩 취한 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해 버린다. 100일 동안 100가지 물건으로 살겠다는 내기를 한 것. 모든 짐은 대여 창고에 보관 중. 하루에 한 가지만 꺼낼 수 있다. 한겨울 맨발의 알몸으로 뛰어가 그들이 제일 먼저 꺼낸 것은 각각 침낭과 코트였다. 겨우 몸을 가린 채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다음 날인 2일 차부터는 필요한 물건을 칠판에 고심해서 적으며 신중을 기하기 시작한다. 점점 그들이 하나씩 더해가는 물건을 보면서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몰입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알몸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골라야 할까? 영화는 이들의 험난하고 코믹한 나날을 따라가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를 넌지시 건드린다.


비슷한 맥락으로『100가지 물건으로 살아보기』란 책도 있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블로거인 데이브 브루노는 1년 동안 100가지 물건으로 사는 공언을 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다. 다만 그는 딱 100개가 아니라 어떤 물건은 한 종류로 통칭해 분류한다. 이를 테면 책, 속옷, 양말 같은 류가 그렇다. 가족과 함께 쓰는 공유품은 제외하고 개인물품에 한정해 100종류로 1년을 사는 프로젝트에 돌입해 단순한 삶을 향해 나아간다.


모두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에 꼭 필요한 물건부터 시작해 생활 전반을 재정비하는 사람들에 가깝다. 만약 100가지 물건으로 일정 기간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물건을 고를까? 이불, 베개, 칫솔, 치약, 속옷, 상의, 하의, 신발, 수저, 그릇… 사람에 따라 품목 차가 겠지만 생필품 스무 개가량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23번까지 빠르게 써 내려가다 이후부터는 정체를 맞았다. 수첩을 쓰려다가 ‘아니야, 노트북이 있으니 수첩은 꼭 필요 없을 수도 있겠어.’, ‘컨디셔너도 필요하겠… 아니야, 올인원 샴푸를 쓰면 되겠네.’하고 어느덧 가짓수를 합치고 있었다. 24번부터는 정하는데 오래 걸려서 급기야 펜을 놓고 말았다.


휴... 100개의 리스트를 채워가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접어두고 대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부터 떠올려 보기로 한다. 당장 꼽은 것은 책과 필름 카메라.



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물건 두 가지이다. 매일 밤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안식처인 책, 여행의 10년 지기 동반자인 하나뿐인 필름 카메라. 결국 내 취향과 정체성을 압축하자면 독서와 사진이었다. ‘그래, 나는 이 두 가지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잘 꾸려가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두 물건에 세트처럼 따라붙는 필름과 포스트잇이 더해진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필름이 꾸준히 필요하고 독서 중 인상 깊은 부분을 표시하는 포스트잇 또한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4개를 우선으로 꼽다 보니 필름과 포스트잇을 요즘 필요한 두 가지로  떠올린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100개의 물건을 써 볼 참이다. 리스트를 완성하면 나의 삶 전반이 명료하고 또렷해지지 않을까? 100개를 고르는 건 어렵겠지만 삶이라는 여행짐을 꾸린다고 생각하면 서서히 채워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여행 짐을 꾸릴 때 빈 캐리어에서 시작해 꼭 필요한 물건만 담는 것처럼 일상의 물건도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꼭 필요한 물건, 나의 의식을 아름답게 가꿔주는 물건을 하나씩 더하다 보면 어느새 리스트가 가득 차겠지. 100개의 물건은 다름 아닌 나일 것이다. 명징한 내 삶의 단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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