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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wol Mar 30. 2024

내가 바로 유희왕

09. 취미




봄이 더디다. 2023년 3월 30일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속에는 벚꽃이 만연하고 목련은 흐드러진다. 조금 뒤인 2023년 4월 3일을 보니 그새 꽃잎이 떨어져 벚꽃 잎이 융단처럼 펼쳐진 보도블록을 담아 놨다. 내일이 2024년 3월의 마지막 날이건만 목련도 채 꽃잎을 떨구지 못했다. 한 해, 한 해 더위가 무서울 만큼  빨리 찾아와 진을 쏙 빼며 더디게 갔다가 가을은 훅 스치고 간 뒤, 아주 긴 겨울이 지속되는 것 같다. 내일모레면 4월인데, 꽃구경은 아직 한참 먼 이야기 같다. 춥다. 그럼에도, 기온은 살금 올라 겨울코트 입기 머쓱한 날들이 오긴 왔다. 겨울옷은 정리하고, 지금 당장 걸치지 않으면 언제 입게 될지 모를 봄 외투를 입어야만 한다. 봄 외투를 톡톡히 걸쳐 입고 길을 나서기 좋은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좋은 날들에 유희거리가 많다. 이번 챕터는 내가 서울에서 즐기는 은밀한 유희, 취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취미 1.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시오

홍콩을 여행 한 이후, 모든 게 다 좋았건만 굳이 워스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홍콩 도로에서 본 그것이 서울 도로에서 본 그것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상세한 서술은 생략한다. 암튼, 서울에서 처음 맞이한 봄과 여름 그 사이, 귀갓길에서 본 그것을 나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생긴 버릇 아닌 버릇이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걷던 나는 땅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집까지 가는 동안 그것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는 방도였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은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길에...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서술하진 않겠다. 암튼, 말하자면 길에 지뢰가 너무 많다. 그 지뢰들을 피하려고 땅을 보고 걷게 된 것이다


그랬는데? 지뢰들은 잊히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양파나 파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립스틱, 명찰, 가방에서 떨어진 것 같은 귀엽지만 때 탄 인형 등 다양한 물건이 땅에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찍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따로 앨범을 만들어 땅에 떨어진 수상한 것들, 사연 있어 보이는 물건을 찍고 저장했다. 그것들은 걷다가도 발견됐고, 버스를 타서 무심코 바닥을 봐도 발견됐다. 물건들만 발견된 것은 아니다. 땅에서는 건물 유리, 자동차의 어떤 부분이 빛과 맞닿아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나는 주로 버스를 기다리며 무지개를 심심찮게 찾아냈다. 땅에 떨어진 물건들과 같이 형태는 분명하지 않아도 무지개를 발견하고 찍은 날은 기분이 좋았다.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부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 2. 고개를 들어 눈높이를 보시오

그렇다고 땅만 보고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땅을 보고 걷는 것 못지않게 당연히 눈높이에 맞춰 걷기도 한다. 그러면서 보는 것들은 주로 건물이다. 서울에서 주로 건강을 위해 산책이란 이유를 붙여 자주 걷는다. 웬만한 거리는 걸으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당연히 심심하니까 다니는 길에 있는 건물을 유심히 관찰한다. 아는 건물들이 발걸음 속도에 맞춰 휙휙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목적지가 있는 산책이므로,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라 하더라도 바로 레이더에 들어오진 않는다


그럼에도 유난히 눈에 걸리는 건물들이 있다. 원래 있었는데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든다거나(리노베이션됐을 확률 99%),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감은 무척 컸으나 목적지가 아니었으므로 스킵했을 건물들이다. 시간이 날 때, 바로 그런 건물에 들어가 볼 결심을 한다. 물론 목적지를 그 건물로 잡고 무작정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간판 정도는 저장해 두었다가 검색해 본다. 뭐 하는 곳인지, 언제 열고 닫는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인지. 나는 건축물과 인테리어에도 사사로운 관심이 많아 건물 탐방을 즐긴다. 그리고 외벽에 사로잡려 마음먹고 찾은 곳은 대개 내부 역시 흥미롭다. 자재도 독특하고, 인테리어 또한 아름다워 구경하는 재미가 너무 있다. 서울에는 이런 곳이 의외로 많다


취미 3.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보시오

내 유희 중 하나는 광화문에 가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광화문 일대에 퍼져 있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것.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물론, 덕수궁 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주로 찾는다. 특히 서울관은 천고가 아주 높다. 전시를 보다 보면, 눈높이가 아니라 까마득한 천장에 설치된 미술 작품도 볼 수 있다. 이때 작품들은 ‘본다’기 보다, ‘체험한다’는 경험에 가깝다. 대개 천장에 설치된 작품들은 내가 굳이 고개를 치켜들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자칫 놓치기도 한다. 대개 눈높이에 설치된 미술 작품들과 다르게, 고개를 한껏 젖히고 높은 천고의 미술관을 백분 활용한 작품들을 마주하면 그 작품도, 미술관도 몇 배로 웅장하게 느껴진다. 내가 작품을 올려 보는 게 아닌,  작품이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쩐지 으스스하기도 하다. 어쩌면 생경한 이 경험이 나쁘지 않다. 외려 즐겁다



좀 더 액티비티 한 취미를 기대했나?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쉽지만, 앞서 내가 소개한 유희들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고 소중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기쁨. 나는 이런 기쁨들을 앞으로도 더 늘려 갈 참이다. 내 주머니 안에 넣고, 울적할 때도 심심할 때도 행복할 때도 마구잡이로 꺼내 다 즐길 작정이다. 자신만의 유희왕 셋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 배부른 일도 없는 것 같다. 우리 모두 합시다. 유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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