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취미
아마 중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여자 친구 셋과 함께 각자 집에 있는 장비(텐트, 침낭, 가재도구 등)와 용돈을 긁어모아 전북에 위치한 어느 계곡으로 떠났다.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이면 모든 예약과 계획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시외버스를 타는 것부터 목적지를 찾아가는 모든 일의 하나부터 열까지 게임 속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닥치는 대로 했다
지나가는 어른에게 물어물어 무사히 목적지인 계곡에 도착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복잡한 텐트를 뚝딱뚝딱 쉽지 않게 지어냈다. 고층 건물을 지어낸 기술자처럼 기세등등 뿌듯한 마음으로 계곡물에 담가놓은 시원한 수박 하나를 쪼개 먹었다. 가지고 있던 용돈을 탈탈 털어 산 식재료로(그래봤자 라면을 비롯한 인스턴트 제품이었지만) 알차게 식사도 마치고는 처음 떠난 여행의 설렘 탓인지 까르르 웃어대며 수다를 떨다가 모두 평소보다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어린 소녀들의 첫 여행의 밤은 무탈하게 마무리되는 듯 싶었다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햇볕은 강했고 시원하게 물놀이를 하게 했던 한낮의 날씨와는 180도 다르게 강풍을 동반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텐트 천장은 고인 빗물로 인해 터질 듯이 내려앉았고 바닥은 계곡물이 급속하게 불어난 탓에 잠기기 일보직전이었다. 누구였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낌새를 눈치챈 한 명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친구들을 하나씩 깨웠다
원래부터 계획이 없었던 탓에 이런 비상사태는 더 계획하지 못했고 대책도 없었다. 무작정 천장에 고인 빗물을 쳐내고 바닥의 빗물을 퍼내는 일을 해낼 뿐. 다행히도 주변에 텐트를 치고 계셨던 분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고 무사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지만 불어난 계곡물은 여전히 위험하다는 주변 어른들의 판단으로 근처에 있는 친구의 친척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집에 안부 전화를 돌린 우리는 집안 가풍에 맞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기가 차지만 용기가 가상하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였을까.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기억 탓인지 그 후로도 꾸준히 돈과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떠났다. 그리고 취미가 무엇인지 공란을 채워 넣어야 하는 순간들이 올 때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여행"이라고 적고 말했다
여행이라는 취미를 통해 마음이 잘 맞는 지인과 떠나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서로의 성향을 알아보고 맞춰보기도 한다. 혼자 떠난 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온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아쉬운 헤어짐을 마주하기도 한다. 내가 살던 삶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른 점을 겪기도 하고 지향하는 점을 만나기도 한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면서 매끄럽게 마무리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며 겪지 않아도 될 우여곡절에 멘털이 탈탈 털리기도 한다
여행은 일상에 대한 소중함과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일상에서 여행을 하기도 한다.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알기도 하고 알고 있던 나와 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어떤 취미보다 돈과 시간을 많이 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게 충족되기 전에 마음이 내키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것들에 ‘체력'을더해 삼박자가 어우러져야 할 수 있는 취미가 되어버렸지만
여러 나라와 지역을 돌고 돌아 결국에는 국내 대표적인 여행지인 제주에 터를 잡은 나는 여행을 일상에 두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지고 맛집이며 카페다. 보통의 일상을 보내면서 종종 여행자로 분하기도 하고 찾아오는 지인과 함께 여행처럼 일상을 보내곤 한다. 매일 취미생활을 하는 셈이다
일상을 여행처럼 하면서 또 여행을 일상처럼 보내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녀왔던 곳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기도 하고 또 앞으로 갈 곳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휴대폰에 깔아 둔 항공권과 숙소 예약 사이트를 제 집 드나들듯 접속하고는 체력만 남아있는 지금, 내일의 돈과 시간을 미리 계획하며 예약 버튼을 꾹 누른다
* 떠나 크라 : ‘떠나겠어'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 ‘-겠어'는 ‘-크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