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맛집
내 인생에 식(食)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싶을 정도로 먹을 것을 좋아하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 나서기도 좋아하는 자칭 맛집 헌터인지라 이번 챕터는 쓰기도 전부터 행복한 고민에 빠졌더랬다. 위 아 더 원일만큼 전 세계의 음식을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음식이 아카이빙 되어 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끄집어내야 할까
어느 지역을 가든 이제는 음식이 평준화가 되어 있어 놀라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지역만의 식재료와 조리방법, 음식을 접할 때는 역시나 즐겁고 흥미롭다. 그 낯설고 어색하지만 흥미롭고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음식의 세계는 여기 제주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제주의 대표적인 음식이라면 흑돼지와 신선한 회를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관광객의 니즈에 맞춰 다양한 흑돼지 전문점이나 횟집이 관광지를 비롯해 제주 전역에 퍼져 있는 것도 맞다. 나도 종종(아니 꽤 자주) 제주를 찾는 지인과 함께 관광객에게 유명한 맛집과 도민들에게 알려진 맛집을 찾아 나서기도 하니까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제주 방문의 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제주를 여러 번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제주를 자주 오게 된 사람들은 전형적인 관광객 대상의 식당이 아닌 좀 더 새로운 제주의 맛집, 제주에 사는 도민들이 찾는 평범한 식당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민 맛집"은 제주를 떠나기 전 꼭 찾아봐야 할 필수 검색어가 되었다
내가 이번 챕터에서 소개하고 싶은 식당도 물론 “도민 맛집"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다닐 때만 해도 관광객은 1도 없는 정말 찐 도민 맛집이었다. 이제는 종종 관광객도 찾고 있지만, 여전히 그 동네를 잘 아는 도민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도민들의 생활권인 제주 원도심. 평일이면 관공서를 비롯해 수많은 회사와 사무실을 직장인들이 오갔고, 주말이면 가족 단위부터 친구, 연인 등 삼삼오오 모여 쇼핑과 유흥, 여가를 즐기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제 그 영광은 모두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고, 그 자리를 신제주라는 신도심에게 내주었지만 여전히 제주 사람들에게는 내어줄 수 없는 마음의 지역이다
어느 지역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상점가를 지나 한적한 골목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식당은 <북교해바라기>이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팔길래 이번 챕터에 당당히 주인공을 차지했는지. 여러 메뉴를 팔고 있지만 단연코 이 식당의 원탑은 순두부찌개다. 금이라도 뿌린 순두부인지, 얼마나 대단한 순두부이길래…?라고 물으신다면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그란 비닐 팩에 담겨 푸딩처럼 보드라운 식감을 가진 순두부로 만든 찌개가 아니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식감과 정형화된 동그란 모양이 아닌 모두부를 으깬 듯한 비정형의 모양에 단단하면서도 몽글하다. 다짐육도 듬뿍 들어가 있어 찌개를 한 숟가락 뜨면 두부와 고기가 한가득이다. 함께 나오는 반찬도 일품인데, 그중에서는 별도 판매까지 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 오징어 젓갈과 깻잎지이다. 오징어 젓갈의 경우, 메인인 찌개가 나오기 전에 밥 한 공기를 뚝딱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맛이 참 좋다
가게에 들어서면 조금은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는 친절한 사장님이 척척 주문을 받고 어머니로 보이는 할망이 적극적으로 손님맞이를 한다. 홀과 주방의 케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고, 종종 사장님과 할망의 투닥거림이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을 잊게 한다
맵기 단계는 순한 맛, 중간맛, 매운맛이라고 적혀 있지만 입맛에 따라 미세한 조절도 가능하다. 중간맛 조금 덜 맵게, 매운맛보다 더 맵게 등 맵기 조절기가 있는 듯 척척 알아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해 준다. 지금은 메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전에는 아는 사람만이 주문할 수 있는 계란 프라이 메뉴가 있다. 매운 정도를 떠나 실과 바늘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순두부찌개의 단짝이다. 여기에 갓 들어온 제주막걸리 한 잔을 더한다면 그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이 부러울쏘냐. 2명이 와도 대부분 각자 맵기에 맞는 순두부를 시키고 비빔밥을 추가로 시키는 것이 이 식당의 국룰이다. 메인 메뉴인 듯한 비빔밥과 냄비우동은 사이드 메뉴랄까
멀지 않은 곳에 비슷한 상호명으로 같은 음식을 내는 식당도 있다. 그곳이 관광객에게 먼저 알려지기도 했고, 최근에는 먹방에 일가견이 있는 ‘풍자'가 방문하기도 해서 웨이팅이 더 어마어마해졌다고 한다. 음식의 맛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쩐지 정겨운 분위기에서 먹는 <북교해바라기>가 날은 더 좋다. 이게 ‘도민 맛집'의 힘인가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음식이라는 것은 호불호도 강하고 개인의 취향이 크게 반영되는 카테고리라 제주를 찾는 지인들에게 맛집 소개를 부탁받으면 꽤 고심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제주까지 와서 순두부???라고 의문에 부연 설명까지 친히 해가면서 알려준다. 먹어보고는 뭐 별 거 없는 평범한 순두부찌개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 종종 생각나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곳이니까
* 둠비 : ‘두부'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