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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리 Jul 10. 2023

현재진행형인 마음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사랑 아닌 사랑을 싸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재진행형인 마음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끝난 후에야 그게 나에게 어떤 궤적을 남겼는지, 앞으로 나의 궤도를 어떻게 바꿀지 깨닫는다. 주로 사랑이 그랬다. 사랑에 조각난 나를 주섬주섬 챙겨 향하는 곳은, 싸랑이다.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닌 사랑을, 나는 ‘싸랑’이라고 부른다. 연인은 사랑하고, 가족과 친구들은 싸랑하는 식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시카의 시 <감사>를 읽고, 싸랑하는 친구 은선을 떠올렸다. 매거진 <쎄씨> 어시스턴트 때 만나 10년째 함께하는, 민낯의 감정을 나누는 친구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중략)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비스와바 쉼보르시카 <감사> 中




사랑할 때, 나는 나를 기꺼이 잃는다. 서로 물들이고 흐드러져 잔뜩 말랑하고 촉촉해진다. 마중 나간 마음은 설레고 배웅하는 마음은 아쉽다. 내가 나로부터 어디까지 멀어질 수 있는지, 그 사람과 얼마나 섞일 수 있는지 새롭게 발견한다.


깊어지는 사랑과 달리 —어쩌면 그래서—나는 점점 얕아진다.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하고, 나의 중심은 희미해지며, 겨우 절반의 나만 남는다. 마중 나간 마음이 초라하고 배웅하는 마음이 저민다. 그런 스스로가 충분히 지겹고 부끄러워지면, 이별이 사랑보다 쉬워진다.


싸랑과 함께일 때, 나는 더 또렷해진다. 매듭짓지 못한 마음도 완결 지을 수 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은선에게 연달아하며 깨달은 건, 내 이야기가 이 아이에겐 원하는 포물선을 그리며 원하는 지점에 꽂힌다는 것. 나부터도 더 정확한 감정을 더 적확한 단어로 뱉는다.


평론가 신형철은 <씨네21> 칼럼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말했다.


“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정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도 함께 인용한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은선에게, 정확한 문장을 쓰며 나는 잠시 훌륭해진다. 정확하게 사랑받으며 고통을 던다. “난 요즘 내가 싫었어.”라고 시작하는 편지도, “우린 항상 빛날 거야. 언제든 나인 채로 빛나자. 그 빛나는 순간들의 목격자가 서로이길 바라.”로 끝나는 편지도, 망설임 없이 부친다.


사랑의 부재가 무거운 날, 싸랑을 찾는다. 묵직한 단어들로 한참 깊어지다가, 흩날리는 웃음으로 한껏 가벼워진다. 은선을 통과한 나는 조금 바뀌어 있다. 닮아서 좋고 달라서 좋은 채로 싸랑을 나눈다.


“싸랑해.”

라는 말로 이따금씩 마음을 전한다. 사랑과 싸랑의 차이를 모르는 은선은 답한다.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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