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에게 정해진 은퇴는 없지만, 방송국에 남아있는 작가들의 연령대를 보면 대략 그 끝이 보이는 것 같다. 50대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10여 년 전 어느 작가분이 30대 중반인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오작가도 이제 자기 글 써. 언제까지 방송 글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고 지나쳤는데, 그분은 방송작가로 생계를 잇는 일의 마지노선을 알았던 것 같다.
나도 이제 쉰 살이 목전에 오니 그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담당PD와 진행자, 작가, 엔지니어들이 함께 만드는 협업이다. 방송국 소속 직원이 아닌 작가와 진행자는 봄, 가을 개편 때마다 PD에게 선택을 받지 못하면 말 그대로 백수가 된다.
경력이 쌓이면 그만큼 대우를 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신입PD들의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그들은 작가선생님 대우를 해야 하는 고경력 작가를 꺼린다. 같이 일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신입PD여도 비슷한 연령대의 어린 작가가 일하기는 편할 것 같다. 그러니 누가 나쁘고 못됐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방송계에서 나이든 작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현장에서 밀려난다.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나 또한 최근 몇 년 사이 느끼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라디오 작가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라는 고민에 직면한다. 나는 책쓰기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방송작가를 하면서도 책을 써왔다. 매년 책을 내는 작가들의 부지런함엔 따라갈 수 없지만, 라디오 원고를 쓰며 틈틈이 책원고를 쓰고 출간 권수를 늘려왔다. 나름대로는 방송작가를 그만두게 된다면 책을 쓰는 작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판계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고, 모든 저자가 꿈꾸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길은 쉽지 않다. 대중을 움직일 멋진 책을 써야 하고 운도 따라줘야 한다. 1, 2년에 책 한 권 써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나이 마흔 살이 다되어 아이를 낳은 나로서는 아이가 성인이 되는 시기까지는 지속적으로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방송작가에서 밀려나고, 책 작업도 경제적인 보장을 해줄 수 없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40대 중반부터 생겨난 이 고민의 결과로 책과 글쓰기를 연계한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고, 독서심리치료지도사 1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글쓰기와 관련 없는 제3의 직업을 가질 수도 있지만, 20년 가까이 해온 작가 경력을 버리고, 180도 다른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쉽지 않다. 나 자신이 용기를 내어 도전한다고 해도 엄청난 시간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보다는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능력을 활용해서 더 업그레이드시키거나 새롭게 재편하는 것이 낫다.
내가 만약 글쓰기와 관련 없는 제3의 직업을 갖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더 공부해서 전문가로 나서고 싶은 생각도 있고, 경제활동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고등학교 이후 접은 화가의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느낀 갈증과 생각들을 반영해 교육 관련 일을 할 수도 있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남편을 도와 요식업에 종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나는 여전히 읽고, 쓰고, 보는 삶이 가장 즐겁다. 회사원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기 위해 서울예술대학에 들어갔던 스물아홉 살의 나, 방송작가를 하며 여행작가를 꿈꾸던 나, 휘발되는 글 대신 책을 쓰고 강의에 도전한 나, 지나온 시간과 도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50대 이후의 나 또한 지금의 내가 만들어낼 것이다.
지금 이후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제3의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이 생계를 이어줄 것인가의 문제도 있겠지만, 노년의 내가 만족할만한 일인지, 세상을 떠날 때 후회가 덜할 일인지 가늠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