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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발버둥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감상문

by 오윤

<진격의 거인>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거인들로 인해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인으로부터 도망쳐 거대한 3중의 벽을 쌓고 살아가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는 약 100년 동안 벽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거인의 침공으로 벽이 무너지고, 그 평화는 산산조각 난다. 주인공 ‘에렌 예거’는 거인의 공격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 복수심과 정의감으로 조사병단에 입단해, 인류를 위협하는 거인들과 싸워나가게 된다.

왜 하필 ‘거인’일까?

고대부터 인류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이야기 속에서 거대한 괴물로 형상화해 왔다. 드래곤, 악마, 히드라처럼 초월적인 존재들이 그 예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에서 작가는 왜 하필 ‘거인’을 인류의 천적으로 설정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거인이 결국 ‘커다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격의 거인> 속 거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한 존재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은 단지 외형만 커진 인간일 뿐이다. 벽 안의 인류는 거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을 괴물로 규정하고 두려워하며 증오한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편견’과 ‘이해 부족’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결국 거인은 바깥에 존재하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공포와 분열, 그리고 반복되는 비극의 은유다. 거인은 단지 큰 인간일 뿐인데, 그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갈등을 외부화하고,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려는 본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우리가 괴물이라 생각하는 저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겐 우리도 괴물일 수 있다.”

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실제로 작품 속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중 상당수는, 끝까지 악인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 또한 자신만의 이유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싸움이 누군가에게는 ‘’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진격의 거인>은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선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심장을 바쳐라라는 경례를 하는 조사병단

심장을 바쳐라

<진격의 거인>에는 ‘조사병단’이라는 군대 조직이 등장한다. 이들은 벽 안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를 대신해 거인과 맞서 싸우며, 벽 밖의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슬로건, “심장을 바쳐라”는 작품을 대표하는 문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짧은 구호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 초반부에서 “심장을 바쳐라”는 일종의 국가적 슬로건이자 체제를 지탱하는 충성의 구호로 사용된다. 조사병단은 ‘인류를 구한다’는 대의를 앞세우며, 이 구호는 개인의 생명, 꿈, 두려움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명령으로 기능한다. 특히 ‘에르빈 단장’의 연설처럼, 죽음을 각오한 돌격 직전에 외쳐지는 마지막 결의의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심장을 바친다’는 것은 곧, 개인의 가치와 존엄이 ‘전체의 존속’이라는 명분 아래 지워지는 일을 뜻한다. 그래서 초반의 서사는 종종 ‘전체와 개인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작품이 후반으로 갈수록, 거인이 상징하던 단순한 외부의 위협은 점차 권력, 억압, 역사와 같은 인간 사회 내부의 문제로 확장된다. 등장인물들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보다, 자신의 신념과 삶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심장을 바쳐라”는 구호도 자연스레 그 의미를 변화시킨다.


좀 더 복잡해진 생존의 조건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번뇌와 고통을 안겨주었고, 조사병단의 인물들은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얽매인 채,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에게 “심장을 바쳐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을 강요하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이에게 주어지는 해방의 선언이자, 명예로운 퇴장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벽을 넘는다는 꿈을 가지게 된 에렌(오른쪽)과 아르민(왼쪽)

자유를 향한 발버둥

<진격의 거인>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끝까지 몸부림친 인물이 바로 주인공 ‘에렌 예거’다. ‘에렌’은 벽 안에 갇힌 현실에 분노하고, 좁은 섬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에 반발하며 성장해 왔다. 그에게 있어 자유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 자체였다. 이러한 성향은 작품 후반부, ‘에렌’이 시간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는 능력을 얻으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에렌’은 미래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미카사’, ‘아르민’, ‘벽 안의 친구들’—이 다시 한번 전쟁과 학살의 위험에 놓이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그 비극은 한 번 막아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태만 바뀐 채 되풀이될 예정된 파국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사실 자유와 대조된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고 하면 그 흐름 속에 인간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들을 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 ‘에렌’은 운명에 순응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래도’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을 선택한다.


그 결과가 바로 ‘땅울림’이다—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짓밟는 파멸적 선택. 하지만 이 행위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그에게 땅울림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권을 쟁취해 내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이때의 ‘에렌’은, 인간이 되풀이되는 폭력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도 무력한 체념이 아닌 발버둥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자유다라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프리츠 왕’의 ‘부전의 맹세’처럼 “순순히 죽으라”는 체제의 명령에 저항하는 몸짓이며, 벽이라는 구조물은 이러한 자유를 가로막는 상징물로 기능한다.

치열하게 싸우는 조사병단

이러한 선택의 무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렌’을 가장 자유롭지 못한 인물로 만든다. 그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책임과 고통을 짊어진 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장면은 냉혹하지만, 동시에 매우 시적이다.


결국 작가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대가 없이 얻을 수 없는 무거운 것이며,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선 때때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에렌’이 ‘미카사’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자유가 완성되는 동시에 해방으로서의 죽음을 맞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감상문을 쓸 때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주로 내가 느낀 감정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하지만 <진격의 거인>은 단순한 감상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서사와 철학, 메시지가 복합적이고 깊은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번 감상문에서는 평소보다 더 직접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그 안에 담긴 상징과 주제를 곱씹어보려 노력했다. <진격의 거인>은 확실히 대한민국의 1020 세대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한 불안과 억압, 자유에 대한 갈망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번 감상문을 통해 왜 이 작품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무거운 질문과 통찰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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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_자유를 향한 발버둥:_4.5_ 진격의 거인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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