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엄마에게 병이 찾아왔다.
2008년 여름, 나는 혼자 떠나는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8살이나 됐는데 그런 걱정을 하는 부모님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걱정하던 아빠는 엄마와 같이 가라고 했다.
엄마랑 둘이? 너무 어색한데..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는 엄마와 단둘이 유럽여행을 떠나게 됐다.
처음부터 건강한 20대가 혼자 다니기로 계획한 여행이었다. 엄마가 함께 가는 건 그저 비행기 표 하나 더 끊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호텔방은 2인 1실이니 크게 변경할 것도 없었다. 엄마를 위한 특별한 배려는 별로 없었다. 아니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도 안 했다. 우리 엄마니까.
20대가 그렇듯 온갖 짐을 들고 기차와 버스, 지하철을 타는 여행을 다녔다. 싼 비행기표를 찾아 홍콩을 경유했고, 그곳에서 결혼해서 사는 친구를 만나 잘 대접받았다. 첫 여행지였던 영국은 그나마 나았다. 아빠 친구의 아들도 만났고, 아는 선배 언니도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사람들도 참 친절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파리로 가는 기차역에서는 시간이 한참 남아 햇살이 드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날의 라떼는 유난히 맛있었고, 난 엄마와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기차니까 그냥 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것도 국경을 넘어가는 거라 공항에서처럼 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뛰어가 사정을 이야기해서 겨우겨우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파리에서의 힘든 날들을 예견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파리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유럽의 호텔이 작기도 하지만, 그 호텔방은 정말 작았다. 엘리베이터는 둘이 타면 트렁크를 싣지 못할 정도였다. 문도 수동이었다. 20대의 내가 최대한 저렴한 호텔을 찾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 방에서 더는 못 자겠다고 해서 하룻밤 자고 호텔을 옮겼다. 그날은 다른 호텔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다.
음식은 어떤가. 외국 가서도 샐러드만 있으면 대충 잘 먹었던 나는 한국음식도 별로 챙겨가지도 않았다. 엄마를 위해 중국음식점을 자주 갔던 것 말고는 현지 음식을 사 먹으며 지냈다. 안 그래도 음식을 아주 잘 먹는 편이 아니었던 엄마는 잘 먹지도 못 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미술사 수업을 했었다. 관광은 유럽의 미술관을 중심으로 다녔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9시간 동안 있기도 했다. 그래도 절반도 못 보는 정도로 큰 박물관이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해서 중간에 식당에 갔는데 잘 모르고 시켰더니 아주 이상한 생선요리가 나왔다. 같이 나온 볶음밥도 그냥은 못 먹겠어서 케첩을 섞어서 먹었다. 이제야 좀 먹을 수 있겠다며 수저를 뜨는데, 옆에 앉은 외국 여자가 자기 아이한테 뭐라고 하면서 얼마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루브르 박물관을 나서면서도 나는 또 야경을 보러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모두들 에펠탑으로 향했다. 엄마가 밤에는 위험하다며 극구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너무 지쳤던 것 같다.
여행의 끝자락에 고모할머니가 계신 독일 베를린으로 출발하면서 엄마가 내게 말했다.
아.. 택시도 탈 수 있구나. 한 번도 택시 탈 생각은 안 해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엄마는 그때까지 해외여행은 패키지여행밖에 가보지 않았다. 40이 된 지금의 내 몸뚱이를 생각해보면 난 그 나이에 절대 그렇게 다닐 수 없을 것 같다.
심지어 독일로 갈 때 나는 저가항공사 비행기를 예약했다. 항공편이 연착되어 공항에서 10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동양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옷을 덮고 바닥에 누워 자며 기다렸다. 다행히 우리 엄마는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차가운 크로와상 하나 주는 걸 먹고 버텼다. 베를린에서는 고모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느라 난리가 났다. 우린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고모할머니 댁에 가서야 푹 쉴 수 있었다. 엄마가 한국에 돌아와서 병원에 갔더니 방광염에 걸렸다고 했다. 젊은 딸을 따라다니느라 병이 다 난 거였다.
첫째, 엄마와 나의 위치가 바뀐 느낌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다.
엄마는 나의 모든 일을 인도하고 결정해주었다. 엄마가 보기에 나는 여전히 아이였다. 나는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살고 싶었다. 그 안에서 갈등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행을 가니 엄마는 영어도 잘 못 하고, 생소한 여행지에서 혼자 다닐 수도 없었다. 잠시도 엄마와 떨어질 수 없었다. 여행 내내 난 뭘 먹을지 생각해야 했다. 호텔방도 내가 알아봤다. 어디를 어떻게 갈지, 모든 걸 내가 정해야 했다. 내가 온전히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러자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둘째, 엄마는 정말 참을성이 강했다.
엄마는 나에게 한 번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음식도 안 맞았고 호텔도 불편했다. 택시 한번 안 타고 대중교통만 이용해도 엄마는 묵묵히 따라다녔다. 어디 가자고 특별히 말하지도 않았고, 뭐가 싫다고 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조금 힘들어 보이면 내가 쉬자고 했을 뿐이었다.
셋째, 엄마는 참 소녀 같은 분이었다.
내게 엄마는 강인하고, 차갑고, 원리원칙을 앞세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실 엄마는 파스텔빛 잔잔한 꽃무늬 같은 사람이었다. 내 눈에 안 보였을 뿐, 엄마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깊은 뿌리를 가졌지만 겉으로는 연약한 들꽃 같은 여자. 작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섬세한 선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 엄마를 엄마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보니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이렇게 소녀 같은 엄마가 나 같은 애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도 잘 안 들으면서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만 탕탕 쳤다. 손대는 건 많은데 마무리하는 건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내가 물가에 내놓은 망아지마냥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엄마가 왜 그렇게 나를 단속했는지, 올바른 길을 가르치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춘기 시절부터 대략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이었다. 마음속 높은 담을 쌓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은 나였다. 그 단단한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 같은 우리 엄마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이런 날 가르치려고 더 강해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나를 스쳤다.
이듬해에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식 며칠 전,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나는 엄마에게 사진첩을 선물했다. 유럽여행의 사진들을 뽑고, 그때의 추억을 글로 적었다. 딸을 보내며 서운했던 엄마는 그 앨범을 받고 정말 기뻐하셨다. 지금 보면 추억이 더 많았는데 사진을 많이 붙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