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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니 닮은 딸 낳아 키워봐라!!

1-3. 엄마에게 병이 찾아왔다.

by 오작가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난 이보다 착할 수 없는 예쁜 아이였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시끄러운 쌍둥이 오빠들에 비하면 얌전했지만, 맨날 엄마 옆에 붙어 쨍알거렸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아빠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은 막내딸이었다.


아빠는 쌍둥이 아들을 키우면서도 딸을 원했다. 엄마는 또 아들 낳으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했지만 아빠는 반드시 딸을 낳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뱃속에서 하도 발길질을 해대서 엄마는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다행히 그 뱃속의 아이는 딸이었고, 아빠는 이 막내딸을 너무나 예뻐했다.


쌍둥이 오빠들은 이제 동생과도 부모님의 사랑을 나눠가져야 했다. 아빠가 대놓고 나를 편애하는 만큼 오빠들은 나를 구박했다. 장난치고, 놀리고, 때리기도 했다. 난 그렇게 정글에서 살아남기처럼, 흔한 남매로 자라났다. 오빠들은 네가 지금의 인성을 가지게 된 건 우리 덕분이라고 한다. 안 그랬으면 아주 버릇없었을 거라고. 아빠가 나를 너무 예뻐하니, 자연스레 엄마는 중심을 잡기 위해 나에게 조금 엄격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문제는 사춘기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아가 조금씩 자라나면서 엄마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시곤 했다. 어릴 때 아주 얌전한 애인 줄 알았는데 클수록 아빠를 닮아간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생각의 폭이 넓고 감정의 폭도 넓다. 언뜻 듣기엔 좋은 말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나 스스로도 조절하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뭐든지 새로운 일 벌이는 걸 좋아한다.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했다.


반면 엄마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렇듯, 우리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컸다. 바른 자세와 생각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도록 가르치셨다.

엄마는 ‘평범이 비범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했다. 튀지 않으면서도 남들과 비슷하게 잘 사는 것. 그게 엄마가 생각하는 최고의 삶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을 내게 주고, 그걸 그대로 따르길 원했다. 난 내가 생각한 대로 해보고, 직접 경험한 다음에 받아들이는 걸 좋아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이 비범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번엔 이 학원에 가보자.”

“엄마 난 예전에 다니던 데가 좋아!”

“아니야 지금 옮기는 게 좋겠어.”

물론 지금 보면 엄마의 생각이 옳았다.


“엄마 나 오늘은 너무 힘들어!”

“그래도 지금은 이걸 해야 해. 아파도 학원은 가야지. 아무리 하기 싫어도 할 건 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에게 성실함을 심어주기 위한 마음임을 백번 천 번 공감한다. 그 말 앞에 “현정이가 힘들구나.” 그 말 한마디만 붙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리고 철없던 난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반항이 시작됐다.

어떤 날은 방문을 쾅 닫았다가 혼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차 안에서 엄마한테 소리를 지르다가 ‘나 혼자 갈 거야!' 하고선 차가 멈춘 틈에 내려버리기도 했다. 나는 [어느 소녀의 가출 일기]라는 책을 책장 한편에 꽂아두고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읽었다.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나와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엄마는 참다 참다 화가 나서 나에게 소리쳤다.

“나중에 니 닮은 딸 낳아 키워봐라!!”

나는 엄마가 미웠고, 나중에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들의 엄마가 부러웠다. 친구한테 내가 나중에 우리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면 꼭 나를 지적해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에게 내 마음과 생활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것은.

말해봐야 이해받지 못할 텐데, 차라리 착한 모습만 보이고 말하지 않는 편이 서로 편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사춘기가 지나갔다. 성인이 되었다고 다를까,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는 삶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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