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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Aug 15. 2023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

Triacastela - Vilei

 뜨리아까스뗄라 - 빌레이


달이 바뀌다

스페인 까미노에서 맞이하는 10월의 첫 번째 날.

어느새 날짜 감각은 없어졌고 가끔 오늘은 까미노 며칠 째지? 하는 순례길 일차만 확인하며 걸어왔다. 유난히 춥다거나 날씨가 달라졌다 느낄 때,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을 때 날짜를 확인하면 떠나온 시간에 실감하곤 했다.


9월 1일, 정확히 한 달 전 인천에서 출발해 프랑스에 도착했고, 다음날 생장까지 단숨에 간 후 3일부터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 29일 차, 9월에서 10월로 시간은 흐른다.


오늘은 초반에 두 갈래 길로 나뉜다. 산 실(San Xil)과 사모스(Samos) 길. 산 실은 짧지만 조금 어려운 길, 사모스는 길지만 무난한 길이라고 한다. 두 길이 무려 7km 이상 차이가 나서 우리는 큰 고민 없이 산 실을 선택했다.


갈림길에서 그대로 가면 사모스라서 정신 단단히 차리고 오른쪽 산 실로 들어가야지 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니 어두워 사인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갈림길이 생각보다도 더 가까이 있어서 다른 생각 하는 사이에 살짝 지나가고 만 것이다.


소은이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우리 말고도 몇 명의 헤드랜턴 빛이 한 곳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아차차 지났구나.

갈림길에서 소은이 다른 사람들과 지도를 확인하며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길은 여기야, 아니야 여기야 하다가 부엔까미노로 끝나는 길 위의 이 진지하고 짧은 회의가 역시 너무 재밌다.

결국 그들은 사모스, 우린 오른쪽 산 실 길로 방향을 잡아 들어갔다.

부엔까미노!

이젠 익숙한 말이다.





까미노의 개들

산 실 길은 조금 오르막이 있는 산길이지만 흙이 보드랍고 푹신해서 걷기 나쁘지 않았다. 약간 제주도 곶자왈의 스케일 큰 버전 같기도 하고. 곶자왈은 조금 거칠고 야생적인 느낌이라면 이 길은 좀 더 넓고 잘 다듬어졌달까? 나무가 울창해서 한낮에도 산책하듯 걷기 좋은 길이다.


중간에 도네이션 바가 있어서 뭐라도 사고 화장실을 다녀올까 싶어 들어갔다. 풍성한 과일과 먹을 것이 잘 차려진, 히피스러운 분위기의 쉼터였다. 이미 많은 순례자가 거쳐 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기타를 치며 평화를 노래하고, 명상과 요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모일 것 같은. 와이파이나 화장실 같은 문명이 없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곳. 하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호불호는 있겠다.


화장실이 안 보여 물어보니 화장지를 주면서 따라오란다. 주인장을 따라 메그가 앞장섰는데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손사래를 치며 금방 나온다. 화장실이라고 알려준 곳은 그냥 뒤뜰이었다고. 하하. 물론 급한 사람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일 테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황급히(미안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두 시간쯤 걸으니 드넓은 소 목장이 나왔다. 우유 광고에서나 보던 얼룩소여서 처음엔 젖소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젖은 안 보여서 그냥 얼룩소인 걸로. 잠시 후 이번엔 얼룩개를 만났다. 달마티안 같은 개가 사람처럼 내 옆을 지나가는데 무서워 앞만 보고 걷다가 뒤돌아서 찰칵! 사진에 담았다.


가끔 만나는 스페인의 개들은 거의 큰 개들이라 너무 무섭다. (난 작은 개도 무섭다) 예전에 본 순례길 영상에서 개가 달려드는 상황을 보기도 해서 개를 볼 때마다 긴장하며 걷는다.

그걸 아는 메그는 개가 나타나면 나에게 놀라지 말라며 앞에서 미리 알려주고 내 앞을 든든하게 막아준다. 마치 나의 사정을 잘 아는 20년 된 친구같이, 10년 같이 산 남편같이.

고맙다고 하면 "나는 너의 까미노 남편이야."하고 웃어 보인 곤 했다. 그녀의 강인함과 배려는 언제나 놀랍다.


아직까지는 개들이 달려들거나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무심히 사람들 옆을 지나 제 갈 길을 갈 뿐. 혹은 아주 영리한 소몰이 개들이거나.

예전에 한 번 용서의 언덕을 지날 때, 어떤 누군가 개에게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전해전해 들은 적은 있었다.

혼자 걷는다면 개들도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도시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사리아에 왔구나. 프랑스 생장과는 확연히 다른 도시의 모습이지만 여기서 시작하는 순례자들의 두근거림만큼은 생장의 그것과 같겠지.

그때 생장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 근심 많던 사람들, 시작이 설레고 두려워 얼굴이 말갛고 눈이 눈물처럼 반짝이던 나와 같던 사람들. 더없이 소중한 만남이었고 기억이다. 여기 어딘가에도 그런 만남과 기억이 시작되고 있음을 생각하니 내 일도 아닌데 나는 심장이 쫄깃해진다.


큰 도시라서 들어가는 길도 한참 걸린다. 앞에 순례자 커플이 나란히 걷는다. 자세히 보니 여자가 다리를 절뚝거려서 남자가 잡아주며 걷는다. 왠지 한국 사람 같았는데 (한국 사람이 맞았다) 말을 걸진 않았지만 그 모습이 안쓰럽고 또 애틋해 보였다.

 

도시에서는 무심코 걷다가는 길을 잃기가 쉽다. 여기저기 화살표를 찾아 잘 따라가야 한다.

생각보다 조용하고 한적했던 사리아. 여기도 생장처럼 많은 사람이 출발하는 마을이니, 까미노에서 필요한 것을 파는 장비 전문점이 많았다. 메그가 신발 때문에 어느 장비 전문점을 들르는 동안, 그 앞 벤치에 앉아 배낭을 내리고 신발을 벗고 발가락 운동을 한다. 아..! 살 것 같다. 이 평화로운 쉼.


조금만 더 올라가 식당이 모여있는 곳 중에 마음에 드는 곳으로 들어갔다. 약속대로 사리아에서 점심을 잘 먹기로 했으니. 오늘도 메뉴델디아!

소은이 시킨 시원한 맥주가 참 부러웠지만, 나는 걸으면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이 다 뭐야 탈이 날까 봐 걸을 땐 밥도 잘 못 먹는데. 빌레이까지 남은 거리 3.6km, 50분 정도 더 걸어야 하는데, 이렇게 먹고 저 괜찮을까요?


점심을 거의 끝낼 때쯤 뜻밖의 얼굴들, 리카르도, 지지가 점심 먹으러 들어온다. 이곳에서 만나다니 반가워! 하루만 못 봐도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 리카르도는 폰페라다에서 봤으니 3일 만의 만남이다. 모두 사리아에서 조금씩 더 간다고 한다. 지지는 같은 빌레이로, 리카르도는 그다음 마을까지. 역시 마음이 통했다. 그럼 알베르게에서 만나, 우리는 다 먹었으니 먼저 일어날게.


빌레이까지 가는 길 내내 배가 불러서 걷기 힘들었다. 배낭 허리 쪽 끈을 느슨하게 풀었더니 안 그래도 무거운 몸에 가방의 무게까지 더한 채로 남은 길을 걸어야 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할 때 반전은 찾아온다

도시를 지나 작은 빌레이에 도착하니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인실 방만 아니면 동남아 휴양지 못지않게 안락하고 팬시한 곳이다. 수영장도 있고 식당, 바, 기념품 가게까지 갖추었으니 고급 펜션 못지않다. 역시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는 가끔 행운이 찾아온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뭐를 마셔볼까 하고 바에 갔는데 때마침 호스트가 샹그리아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향긋한 과일이 저렇게 꽉 차 있는데 아니 시킬 수 없지. 양도 엄청나게 인심 좋은 샹그리아를 한잔 들고 야외 테이블에 앉으니 정말로 여기는 휴양지가 아닌가! 주변에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도 나의 샹그리아를 힐끗 보더니 어느새 여기저기 테이블엔 달달한 보랏빛 샹그리아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바람, 습도, 햇살, 포만감, 취기, 모든 게 완벽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박혀서 말없이 있다가 또 수다를 떨다가 또 내일 길을 점검하고 내일 알베르게와 산티아고 호스텔을 예약했다. 베트남에 사는 이탈리안 지지는 넷플릭스에서 본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했고 김밥에 대해 물었다. 소은과 그녀의 친구는 같은 핑크색 차림으로 만나 훈훈한 재회의 순간을 가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럴듯할 때 반전은 찾아온다.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

폰페라다에서 처음 본 유럽 아저씨인데 언어는 안 통해도 늘 유쾌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친하게 지내진 않았는데 비야프랑카에서 만난 이후로 은근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주 마주치진 않아서 못 본 척 지내다가 오늘 결국 선을 넘고야 말았네.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지나가는데 남모르게 머리카락과 귀를 만지며 지나가는 것이다. 아 소오름.

인상을 팍 쓰며 불쾌한 티를 냈고 이후 인사도 않고 웃지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당신은 내가 '폰페라다에서 처음 본 유럽 아저씨인데'까지만 써도 내가 무슨 얘길 하려는지 알 수 있었겠지. 그래. 순례길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아픈 현실. 우리는 어딜 가도 세상 누구도 해칠 것 같지 않고, 얌전하고, 만만한 사람들인가 봐.

하하.

뭐, 그 사람을 비난하고 싶다기보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의 태연함이 어처구니가 없다.


오늘의 남은 시간을 불쾌함으로 마무리할 순 없지. 다행히 오늘 하이라이트는 해 질 녘이었다.


방이 바로 길 쪽에 있어서, 문 앞 의자에 앉아 있으면 느리게 흐르는 스페인 시골의 소박하고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석양이 질 때쯤 소들과 소몰이 개들도 할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해 간다. 퇴근 시간 터벅터벅 지친 우리들 발걸음처럼, 서두르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 축 처진 이들의 퇴근길이 묘하게 재미지다.


이런 풍경을 볼 날도 이제 며칠 안 남았다는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는 해를 붙잡고 싶어 아련해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니 저 석양이 내 마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이 풍경이 나에게 영원이 될 것이 분명해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이제, 까미노위의 모든 것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구나.

하루 이틀로는 부족해.

더 긴 시간을 두며 찬찬히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bonus!

+알베르게 : Casa Barbade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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