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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Aug 11. 2023

갈리시아의 술례자들

La Laguna - Triacastela

라 라구나 - 뜨리아까스뗄라


갈리시아로 들어서다


물안개와 습기로 아득한 새벽. 비는 그쳤다. 

덜 마른 신발을 신고 배낭에 커버를 단단히 씌우고 길을 떠난다. 어제 미처 다 오르지 못한 남은 깔딱 고개를 넘어간다. 물안개 때문에 벌써 머리가 축축하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발밑만 간신히 보인다.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니 집중하지 않으면 발을 헛디딜 것만 같았다. 익숙한 불안감. 시야가 흐려지니 숨도 어딘지 답답해온다. 


평지가 시작되고 안갯속에 얼핏 보이는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일단 보이는 불빛으로 돌진. 불 켜진 바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는다. 조금만 습해도 파마한 것처럼 뽀글거리는 내 곱슬머리. 머리를 풀고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묶는다.

초반 오르막길에 벌써 지쳤다. 어제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메그와 간단한 조식을 먹고 따듯한 커피로 몸을 녹인다. 


"우리 지금 막 갈리시라로 넘어왔데. 잘 안 보이지만 이 길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네."

스페인어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메그가 알려주었다. 

 

아 맞다. 프랑스 길 갈리시아(Galicia)의 첫 도시가 바로 여기 오 세브레이로라고 했는데.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맥주와 뽈뽀(문어요리)가 맛있다는, 무엇보다 산티아고가 위치한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으로 드디어 입성했다. 





오! 세브레이로

아름답다는 길도 오 세브레이로 마을도 어둠과 안개로 전혀 보이지 않으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바에서 나갈 때쯤엔 날이 조금은 밝아졌고 안개 사이로 어렴풋한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뭐지? 이 원시적이고 특별한 집들은? 어두워서 사진으로 담기진 않았지만, 눈으로는 확실히 새롭고 오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돌벽에 초가지붕이 크게 덮인 듯한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독특한 건축물들이 있었다. 바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 대로라면 이 마을 주변으로 비경이 둘러싸여 있을 테지. (지금은 1도 안 보이지만) 

어제 내가 머문 숙소의 바를 스쳐 지나가며 나를 부러워한 사람들, 단언컨대 그들이 어제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선택에 단 한 방울의 후회도 없었으리. 


이로써 까미노를 다시 와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오! 세브레이로. 체크. 



사진출처 : Piornedo



파요사(Palloza)라고 하는 이 건축물은 중세 시대에 유래했을 거라 추정되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구조물이라고 한다. 산지에 있고 눈이 많이 오는 지형에 적합한 구조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타원형 바닥과 추위를 막아주는 낮은 벽, 그리고 눈의 무게와 바람에 안전한 크고 두꺼운 호밀 초가지붕이 그것이다. 

오 세브레이로에는 엘리아스 발리냐(Elias Valina)라는 사재의 흉상이 있는데, 그는 이 마을 성당의 사제이자 까미노를 상징하는 노란 화살표를 표시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시신 또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배의 기적에 관한 유명한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인근 마을의 한 농부가 미사를 듣기 위해 마을로 찾아왔다. 사제는 폭설로 위험해진 길을 왔다며 그를 꾸짖었고, 이후 기도를 하는 동안 농부의 기도대로 그 앞에 있던 빵과 포도주가 고기와 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기적은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 수많은 참배객이 찾아오게 되었고 아직도 성배와 접시는 성당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 참조 : Google Arts & Culture 


단지 건축물 몇 개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니 놀라웠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갈리시아(Galicia)라고 분명하게 명시된 순례길 비석을 확인하고 안갯속으로 또다시 총총 들어간다. 





마을을 벗어나 알또 산 로께(Alto de San Roque) 언덕을 만날 때까지도 안개가 자욱해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주 유명한 조각상이 있는데, 바람에도 굳건히 나아가는 순례자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이곳의 아름다운 전망과 잘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감동과 뷰를 보여준다고 한다. 


까미노에는 순례자를 표현한 설치물이 많다.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의 조각상이 아닌 길 위의 평범한 사람들을 기리고 응원하는 조각들. 고통스럽지만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 조각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고 애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꼭 나 같아서. 우리 같아서. 이 순례자 조형물과 내가 너무 닮아 있어서 마음이 동한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아쉽지 않았을까 싶겠지만, 괜찮았다. 생각보다 안 아쉽다. 길 위의 유명한 것들, 좋다고 하는 모든 것을 보며 가겠다는 욕심은 없다. 길은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보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지나친 것들도 많을 테고. 그냥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뿐이다. 


언덕을 조금 지나자,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과 안개가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듯하다가도 올라가는 산새를 반복해서 걷느라 하늘 볼 틈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좀 전까지 흐렸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되어 있었다. 





갈리시아의 술례자들

산을 꽤 내려온 것 같은데 여전히 산속이다. 뜨리아까스뗄라 바로 전 마을인 폰프리아(Fonfria)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마을 같았다.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아주 나이 많은 나무 하나가 유난히 마을을 보살피고 있었다. 어느 집 2층에 빨래가 널린 걸 보니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빨래를 보니 왠지 안심이 된다. 작은 교회의 문에는 예쁜 꽃이 달려있었다. 


숙소는 최근에 지어진 호스텔처럼 시설이 아주 좋았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조금 여유 있는 샤워를 했다. 오늘도 습한 날씨 때문에 세탁기와 건조기로 빨래를 돌린다. 손빨래를 안 하니 시간 여유가 생겼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힘든 길이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점심을 먹어볼까? 


대부분 점심시간에 도착하는 우리는 시에스타 때문에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오늘도 씻고 나와보니 오후 한 시 반. 다행히 시에스타와 상관없이 계속 열려있는 식당이 있어서 거기로 향한다. 우리 말고도 늦은 점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빠에야와 치킨과 감자튀김, 아이스크림까지 완벽한 구성의 메뉴델디아가 마음에 쏙 든다. 맛 또한 성공이다. 메인 요리는 돼지, 소, 닭, 생선 중에 고민했으나 역시 치킨은 실패의 확률이 낮았다. 로컬 와인은 도수가 낮은지, 어제에 이어 둘이 한 병을 뚝딱하는데도 취기가 안 올라오고 물처럼 술술 들어간다. 

평소 한국에서도 와인을 잘 먹는 편인데, 스페인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와인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달라졌다. 비싸고 무거운 와인들보다, 가벼워 술술 들어가는 스페인 와인이 이젠 너무 좋다. 


아.. 도대체 입맛이 없던 나날들 언제였던가? 기억도 안 나. 우리는 진정 이렇게, 순례길의 '술례자'가 되어가는 것인가?! 





늦은 오후, 초절임이 되어 숙소로 들어오는 소은. 우리보다 6km는 더 걸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꼬. 


"어땠어요? 재밌는 일 없었어요?"


"아니요. 심심했어요. 괜히 혼자 있었어. 같이 있는 게 더 좋더라고요."


소은이 왔으니 함께 논의할 것들을 꺼내 놓는다. 


앞으로 몇 km씩 걸을지 어느 곳에서 머물지 정하고 산티아고 도착 일정을 확정한다. 우리는 5일 후에 도착할 예정이다. 산티아고 호스텔이 벌써 풀 부킹이 많아서 일단 숙소 예약이 시급했다. 몇 개의 숙소를 알아보았지만, 최종 결정은 소은을 따르기로. 

산티아고에서 연박을 하며 하루 더 쉴지, 아니면 바로 무시아 길로 출발할지는 내일쯤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메그와 나는 처음부터 피스테라-무시아 길까지 걸을 생각으로 왔지만, 소은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은 사리아 바로 다음에 있는 빌레이(Vilei)까지 간다. 사리아를 그냥 지나치는 건 아쉬우니 거기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일정을 확정하고 나니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비장함이 맴도는 것 같다. 정신 차려! 우린 전사가 아니라고.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먼 길을 걸어온 소은이 고기 먹고 싶다고 했는데 마트 음식을 먹게 되니 괜히 미안해진다. 대신 내일은 정말 맛있는 거 먹자. 고기 꼭 먹자 내일은. 


공용 키친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중국어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고 카드 게임을 하는 유럽피안 아저씨들이 있었다. 모두 순례자가 아닌 느낌이라 쉽사리 말을 걸진 못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9월의 마지막 날이다. 







bonus! 

+ 오 쎄브레이로 참조 링크 : https://g.co/arts/C5pG9qNqPeLrYR2b9

+ 알베르게 : Pension Albergue LE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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