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franca Del Bierzo - La Laguna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라 라구나
잘못 든 길이지만 잘못 간 건 아니야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설마설마하던 비가 내리고 있다.
출발한 지 5분이 채 안 돼서 내리기 시작한 비는 도저히 그칠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배낭 가장 아래 상시 대기하던 우비를 드디어 꺼내 입어야 할 시간이 왔도다.
비가 오니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며 걸을 수가 없다.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앞서 걷는 사람들이나 노란 화살표를 간신히 확인하며 따라 걷는다. 눈물 콧물 빗물이 뒤범벅되지만 걸음을 멈출 수도 없다.
찻길 옆길을 한참 가는데 느낌이 싸해서 앞을 보니 아무도 안 보인다.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따르는(?) 몇 명의 불빛만 보인다. 멈춰서 지도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잘못 들어섰구나. 그래도 화살표를 따라오긴 한 건데 이상하네 하며 자세히 보니 어느새 도보길이 아니라 자전거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중간에 분명 어디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놓친 것이다.
뒤따라 오던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고 비 오는 길에서 대회의가 열렸다. 결국 킵고잉(keep going), 가던 길로 가보기로. 자전거 순례길이니 좀 돌더라도 도보길과 만날 것이기에.
나중에 안 사실인데, 원래 도보 길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비 오는 질퍽한 산길을 오르느라 꽤 힘들었다고 한다. 우리의 길은 조금 돌아가는 잘못 든 길이었지만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가 오니 이제야 알겠다. 평소보다 두 배는 힘들구나. 쌀쌀한 기온이 체온의 열기와 만나 우비 안쪽이 비를 맞는 거나 다름없이 젖어 있었다. 신발은 점점 비에 젖고 있었고 장갑도 흥건한 지 오래다. 그래도 장갑을 벗지 않는 건 스틱 때문인데, 젖은 손으로 스틱을 오래 잡으면 물집이 생길 것 같았다.
아침 7시에 출발해 5시간을 그냥 땅만 보고 묵묵히 걸었다. 평지였던 길이 어느 순간 오르막길이 되고 있었고 얼마큼 왔는지 어느 마을인지도 모를 곳에 멈춰 섰다. 신발을 벗기도 싫고 신고 있기도 싫은 이 느낌. 차가운 콜라도 마시고 싶고 뜨끈한 커피도 마시고 싶은 이 상태.
커피와 초콜릿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지도를 확인한다. 맙소사... 우리는 어쩌려고 줄곧 비를 맞으며 쉬지도 않고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까지 걸어왔는가. 비가 오니 오히려 걷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일까? 20km 넘는 거리를 단숨(?)에 오다니.
곧이어 마주한 현실은 본격적인 오르막은 이제 곧 시작될 거라는 거. 아니, 20km를 걷고 나서 6km의 산을 오르라니?! 가능해? (제발 누가 아니라고 말해줘...)
사실 원래 우리의 오늘 목적지는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였는데 그전 마을인 라 라구나(La Laguna)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다. 어제 리카르도의 말에 의하면 '내일 미친 오르막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본인은 거기까지 가기엔 무리'라는 것이다. 그는 라 라구나보다 전 마을인 라 파바(La Faba)에 멈춘다고 했다.
대부분 그의 말은 허튼 것이 없었기에 우리도 논의 끝에 라 라구나로 목적지를 바꿨다.
참 잘한 일이다. 이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라스 에레리아스 이후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까미노 역대급이다.
최고 힘든 길. 첫날 피레네산맥보다도 더 힘들었던 날, 바로 오늘.
특히 후반부 6km의 오르막길. 그리고 그 오르막길의 마지막에 급경사가 이어질 땐 진짜 근육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욕도 나올 뻔했다.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근육이 터질 듯 아팠다.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니 친구의 존재도 더 느껴졌다. 아마 메그가 없었다면 '나만의 속도대로 갈 거야' 라며 어디서 나자빠져 버렸을지도(뭐, 그렇게 천천히 와도 괜찮았을 테지만) 모른다. 항상 앞장 서던 메그가 오늘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주니 빗길에 크게 뒤처지지 않고 잘 걷게 된 것 같다. 마지막 오르막길도 메그가 바로 보이는 곳에 늘 있어주니, 저만큼 올라가자 하면서 가까스로 오를 수 있었다.
산길을 거의 다 올라서니 건물 한 채와 화살표가 보인다. 그 길로 가려는데 소들이 거기서 내려오고 그 뒤로 개들이 짖으며 뛰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라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동물 주인인 듯한 사람과 말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걸을 뿐 소들을 가야 할 길로 모는 것은 똑똑한 보터콜리 개들이었다.
그렇게 라 라구나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마을. 민가나 농가를 제외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은 우리가 머무는 그곳 하나였다. 숨넘어가게 고통스러운 오르막을 올라서 만나는 유일한 바. 그래서 이 길을 지나는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들렀다 가는 곳이다.
작은 곳이지만 숙박과 바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이미 꽉 차 있어서, 체크인까지 꽤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비를 맞은 채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기란 정말 곤란한 심정이었다. 어서 샤워를 하고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앉아서 찬바람을 맞으니 금방 몸이 식어갔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도착 일주일 카운트다운
비 오는 날은 손빨래를 하면 안 된다. 빨래가 절대로 마르지 않을 테니. 숙소에 세탁과 건조를 맡기고 드디어 침대로 올라간다. 같은 방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안녕? 이탈리안 지지는 오늘 길에서 여러 번 마주쳤었다. 와! 오랜만에 만나는 YS 언니가 먼저 와 있었다. 반가워요! 젠틀맨 미카엘도 옆방에 머문다고 한다.
젖은 머리로 쉬고 있자니 추워지려고 해 1층으로 내려갔다. 배도 고파서 간단히 또르띠아를 시키고 와인으로 몸을 데울 생각이었다. 그곳에 앉아있으니 오고 가는 순례자들을 살며시 엿보게 되었다. 단체로 온 듯한 미국인 순례자들, 길에서 여러 번 만난 이탈리안 소녀들. 이미 환복을 한 사람들은 여기 머무를 테고, 아직 가방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음 마을까지는 가야 할 테지. 힘든 길에 비도 오니 모두 어딘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여기 머무냐고 누군가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 '부럽다. 좋은 결정이었어'라며 지친 표정으로 떠났다.
작은 마을의 좋은 점은 어디 다른 곳을 갈 필요도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 1~2층 정도를 오르내리며 저녁까지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그만큼 여유로움이 보장된다.
침대방으로 올라가니 뽀송하게 마른빨래가 도착해 있다. 짐 정리를 하고, 메그와 내일 갈 길과 알베르게를 점검한다. 오늘은 논의할 것이 꽤 많았다.
그 유명한 도시 사리아(Sarria)가 가까워지고 있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으면 약 100km 5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 구간만 걸어도 순례길 증명서가 발급된다. 때문에 전 구간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사리아에서부터 걷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이 많아지고 숙소 예약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더 서둘러 숙소 예약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장에서 처음 까미노를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숙소 예약에 대한 걱정이 앞서곤 했는데. 순례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언제나 알베르게 예약 이야기가 화제였다. 그것도 초반 정도의 이야기. 막상 걷다 보니 하루 전에 예약해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리아부터는 분명 사람이 많아질 테니 대책이 필요하긴 할 것 같았다.
오늘을 포함해 산티아고 도착까지 일주일 카운트다운에 들어섰다. 언제 산티아고에 도착할지 가늠이 되는 시점이다. 남은 일정을 함께 논의하고 가장 예약이 어려운 산티아고 숙소부터 서둘러 예약해야 한다.
내일 소은과 다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것들 빼고 남은 것들을 메그와 정리하다 보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되었다. YS 언니와 한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델디아를 시킨다. 언니와는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우리는 교집합이 있었다.
언니가 먼저 자리를 뜨고, 메그와 멍하니 있는데 창밖의 비 오는 풍경이 낯설지 않고 정답다. 오랜만에 메그와 여유롭게 와인을 마신다. 로컬 와인인데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것인지 한 병을 다 비워도 취하지 않았다. 메그와의 첫 저녁 식사가 떠올랐다. 까미노 3일째 팜플로나였는데 식당 고르는 것에 무척 애를 먹었었다. 처음 만났는데도 막힘없던 대화가 참 편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조금 긴장을 했을 거다. 재미없는 자리가 될까 봐 걱정도 했을 테고.
이제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말하지 않는다. 그때에 비하면 말없이 같이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같이 멍 때리는 시간도 많아졌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다. 침묵이 두렵지 않아 졌기 때문이다. 별로 뭘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었달까. 그래, 친구란 이런 거 아니었던가..?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
나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때로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했거나 때로는 무엇을 증명하길 요구하기도 했을까? 옆에서 아무런 조급함 없이 공기 같은 친구가 나는 왜 되지 못했나?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는 걸 잠시 잊었었나 봐. 다시 떠올리게 되어 다행이야. 지금 떠오르는 얼굴들을 기억하자.
보고 싶다 너희들. 내 영혼의 자화상. 남은 내 친구들.
내일은 다시 소은과 만난다. 6일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하지만 우리는 무시아까지 5일은 더 걸어갈 예정이라 아직 심란하거나 실감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산티아고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 샥 하고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이 있다. 일종의 울렁거림일지도. 이 파도는 아마 하루가 다르게 거세질지도 모르겠다.
끝은 언제고 온다. 그러니,
남은 하루하루를 또렷이 보내야겠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늦도록 내렸다. 내일도 비가 올까? 축축한 등산화는 내일이 되어도 마르진 않을 것 같다.
bonus!
+ 알베르게 : Bar Albergue La Escue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