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ferrada - Villafranca Del Bierzo
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Are you ready?"
"I am ready."
어깨 배낭끈을 잡고 방긋 웃는 메그의 얼굴을 보니 오늘도 기운이 난다. 소은이 없어 메그와 둘이 출발하는 날. 어쩐 일인지 앞뒤로 순례자들이 안 보여 이 길이 맞나 자꾸 지도를 확인하곤 했다. 가로등 조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폰페라다의 긴 공원을 지날 때는 삭막함에 살짝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둡고 텅 빈 도시는 산길만큼이나 무서운 법이다.
비가 올 듯 말 듯. 가끔 샤워처럼 부슬거리다 말다 하는 축축한 새벽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까미노를 걸으며 비를 맞아본 적은 없었다. 비라곤 언젠가 한 번 숙소에서 쉴 때 지나간 소나기 정도였다. 스페인은 여름에 장마가 오는 한국과는 반대로, 6~9월이 가장 비가 적고 나머지는 대체로 비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9월은 한두 번 비 소식이 있을 법도 한데. 올해 스페인이 가뭄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며칠 전부터 아침 하늘이 흐리고 꽤나 습하고 축축한 것이 조만간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 10월로 넘어가니 시기적으로도 비를 만날 확률이 높다.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길, 해가 뜨려고 하니 나도 조금 마음이 놓인다. 오늘 길에서 보는 첫 순례자가 저기 앞에 어렴풋이 보였다. 그가 가까워지자 비로소 리카르도라는 걸 알았다. 리카르도. 오늘도 혼자 일찍 출발해 걷고 있었구나. 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수염이 유난히 비장해 보인다.
다정하고 슬픈 리카르도와 오늘도 좋은 동행이 되어 걷는다. 어느덧 까미노 비석의 숫자는 200km에서 100km대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를 두근거리게 한 <스페인 하숙> 순례자들
까까벨로스(Cacabelos)에 들어서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마을 같았다. 한적한 바에 들어가 콜라만 시켰는데 따듯한 수프를 서비스로 내어 주셨다. 안 그래도 춥고 습한 날씨에 뜨거운 국물 생각이 나던 참이었는데. 달걀과 감자가 풀어져 있는 수프인데 약간 걸쭉하고 매콤한 것이 오늘 같은 날에 아주 어울리는 맛이다. 나도 모르게 경직되었던 얼굴과 몸의 근육들이 사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복 받으실 거예요.
따듯한 친절에 기운을 얻고 다시 출발하는 길. 까까벨로스 마을 전후에 펼쳐진 포도밭이 풍요롭다. 와이너리 또한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한 시간쯤 걸으면 조금 힘든 오르막길을 잠시 만난다. 오르막길 내내 양쪽으로 작은 포도나무들이 줄 서 있는 포도밭을 볼 수 있다. 광활한 평지의 포도밭과는 다르게 비탈길의 포도밭은 조금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좀 더 역동적이면서 아기자기한 것이 귀여운 구석이 있달까.
그러고 보니 <스페인 하숙>에서 출연자들이 비야프랑카 마을에 처음 입성할 때 걸어갔던 길이 이길 같기도 하다.
3년 전, 팬데믹이 오기 전 까미노를 준비할 때 마침 방영했던 <스페인 하숙>을 즐겨봤다. 사실 3명의 출연자 보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순례자들을 유심히 관찰했었다. 배낭과 소지품, 어떤 양말과 신발을 신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 스페인 날씨와 까미노 풍경, 알베르게 시설도 눈여겨보았다. 지금껏 글(온라인)로만 배운 순례길 여정을 TV를 통해 생생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보게 되니 매회마다 두근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덕분에 좀 더 까미노 길을 머리에 그릴 수 있었고 즐겁게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번 까미노 오기 직전에도 다시 정주행 했는데 여전히 두근거리고 재밌었다. 바로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였던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가 오늘 목적지다.
포도밭길을 따가 한참 걷다 보면 저 멀리 높은 곳에 성이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앞으로 마을이 들어서 있다. 다 왔구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구불구불 길다. 비탈길의 포도나무처럼 꽤 경사가 있는 비탈길에 집과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비탈길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구불구불 골목을 걸으니 어느새 비야프랑카 중심에 와있었다.
일찍 도착해서 시간도 많았고 생각보다 체력도 남았다. 침대 배정을 받고 샤워와 빨래를 끝낸 후 근처 마트에서 점심을 사다 먹는다. 오전에 바에서 먹었던 수프를 생각하며 비슷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무난하게 단호박 수프를 샀다. 메그도 나도 정말 국물이 그리웠던 날이다.
공용 부엌에서 우리처럼 점심을 만들어 먹는 이탈리안 지지와 인사했다. 메그와는 이미 인사를 튼 사이였고, 나는 그를 처음 만난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는데 이전 사진들 속, 그러니까 산 마르띤 델 까미노 알베르에 사진 속에 그가 있었고, 폰페라다 사진 속에 그가 있었다. 영어가 아주 유창한 그는 특이하게 현재 베트남에 거주한다고 했다. 그만큼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춥고 습해서 복도에 난로가 켜져 있었다. 알베르게 호스트는 이런 날에는 밖에 널어도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며 난로 근처에 널어놓으라고 알려주었다. 순례자들은 난로 근처에 사이좋게 빨래를 널어 말리고 손과 발을 녹이러 난로에 모여들곤 했다. 반가운 부산 부부 쌤들을 만났고 쌀쌀한 폴란드 순례자가 같은 방으로 왔다.
그들 말고는 아는 얼굴이 없다. 예전 같으면 좀 더 인사 나누고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 이제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적극적으로 나누게 되는 일은 드물어져 간다. 새로운 관계가 싫거나 두려운 건 아니다.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고 있을 뿐이다.
사회인이지만 회사인은 그만할래요
메그가 신발 깔창을 구해야 해서 함께 마을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까미노에서 다른 장비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신발과 관련된 것만은 쉽지 않은 듯하다. 메그의 신발은 비가 오면 샐 정도로 터지고 해져서 며칠째 도착 마을마다 신발을 보수하기 위해 동분서주 바빴다. 선뜻 새 신발을 사서 걸을 순 없고 같은 모델의 신발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찾기 힘든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지지도 같은 브랜드의 같은 모델을 신고 있었는데 브랜드 명성에 비해 신발이 너무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들의 신발에 비해 내 미드컷 등산화는 투박하고 무겁고 국내 브랜드지만 아주 훌륭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마을 3바퀴 정도 도는 동안 당연히 <스페인 하숙> 촬영지도 가보았다. 문 앞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기웃거렸던지, 게스트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종이가 붙여져 있다. 나도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나왔다. 유해진 씨가 매일 아침 여닫던 철문도 반가웠다. 그가 자주 가던 철물점이 있었는데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순례자들이 걸어 들어오던 마을의 중심지, 야외 테이블이 즐비했던 그곳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곳은 광장 같은 역할을 하는지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고 지나갈 때마다 아는 얼굴이 보이곤 했다. 인사 안 받던 아저씨, 어제 처음 인사를 받아줘서 나를 울게 만든 아저씨가 여전히 혼자 앉아 있다. 멀리서 내가 웃으며 손을 흔드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히힛.
저녁 먹을 곳을 찾다가 결국 여기 중 한 곳에 들어갔다. 늦은 점심 탓에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아서 간단한 핑거푸드를 시켜서 메그와 나눠 먹었다. 오늘 너무 돌아다녔는지 피곤하고 추웠다. 와인을 한잔 먹으니 금방 취기가 오른다.
프랑스 이브 아저씨가 들어와 우릴 발견하고는 합석하게 되었다. 간단히 먹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메뉴델디아를 먹는 아저씨와 뜻밖의 긴 디너 타임을 가지게 될 줄이야.
그와는 꽤 오래전부터 인사 나누고 있는데 그동안 나이를 알 수 없는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던 것 같다.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과 호구조사에 조금 지쳤다. 특히 직업이 뭐고 무슨 일을 했고 앞으로 뭘 하며 살 건지 이런 질문을 디테일하게 받으니 급 피곤해졌다. 한국말로도 쉽지 않은 말들을 영어로 설명하려고 하니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책 중에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라는 타무라 유미의 일본 만화가 있다. 쿠노우 토토노우라는 남주 캐릭터가 역대급 최애 캐릭터인데 그 이유를 말하자면 끝도 없다.
한 가지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소개하면, 주인공이 처음 만난 사람(또래 남자)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또래남 : 쿠노우, 여친 있어?
주인공 : 없습니다.
또래남 : 남친 있어?
주인공 : 없습니다.
또래남 : ...
주인공 : ...
또래남: 어, 왜 안 물어봐? 나한테도 물어봐야지 여친 있냐고.
주인공 : 그런 건 물어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요.
또래남 : 난 여친 있어. 있다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한다. 다음에는 저런 질문을 조금 덜 피곤하고 유연하게 넘기는 방법이 없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나름의 현답(?)이 떠올랐다.
I'm retired
나 은퇴했어요.
은퇴했다는 말. 생각하고선 스스로 꽤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것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래, 나 진짜 직장인으로는 은퇴하자.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은 계속 찾을 거야. 하지만 회사인은 더 이상 되지 않겠어.
준비된 파이어족은 아니지만 누가 뭐래도 해보자. 가보자.
직장을 그만두고 어떻게 살까 막연하고 모호했던 마음이 어느새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었다.
bonus!
+까까발로스(Cacabelos)에서 들렀던 바(bar) : La Caverna de REM
+비야프랑카 알베르게 : Albergue L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