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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Jul 25. 2023

나도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일 테니

Foncebadón - Ponferrada

폰세바돈 - 폰페라다



철의 십자가 앞의 사람들

안개가 자욱한 철의 십자가를 만나러 간다.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를 정도로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뒤를 돌아보니 어제 포근했던 포세바돈에서의 일은 하룻밤 꿈이었나 싶다.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철의 십자가에 다다랐다. 명성보다 훨씬 평범한 곳에 있는 낡고 오래된 기둥, 그 가장 높은 곳에 솟아있는 철 십자가. 주변에는 다양한 모양의 돌들이 쌓여있는데 순례자들이 자기가 온 곳에서부터 돌을 가져와 여기에 두고 간다. 그래서 여기는 수많은 간절함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해 여기까지 돌멩이를 가져와 소원을 빌고 그리워하는가. 볼 수 없는 이들이 그리워서, 나의 죄가 무거워서, 견딜 수 없이 슬퍼서.

마음의 돌멩이 하나 내려놓은 모든 이들 이제  조금은 홀가분하게 내려갈 수 있기를.


수많은 사람의 소원과 바람이 뒤섞여 누구라도 숙연해지는 곳.

그래서 이곳에 오면 어쩌면 당신은 울지도 모르겠다.



내려오다 발견한 산속 안개에 휩싸인 어느 바. 중세 깃발이 멋지게 휘날리며 오랫동안 순례자들을 맞이했을 것 같은 곳이었지만 어째 운영 중인 것 같지 않았다. 오늘 내가 좀 더 먼 마을에서 출발했다면, 아니 아마 안개가 조금 덜 했더라면 들어가 기웃거려 봤을지 모른다. 판타지 장르가 되어 마법이 깃든 차를 내어줄 것 같이 신비로워 보였지만 안갯속이 조금 무섭기도 해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아쉬워 사진만 찍어 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호스트로 보이는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찍혀있었다. 다음에 순례길을 간다면 꼭 들러서 마법의 차 한잔 마셔볼 테다.






파노라마 뷰와 스페인식 아침 식사

큰 돌이 박혀있는 산길은 힘들다. 발을 잘못 더딜까 봐 바닥을 보고 가야 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고개가 아플 지경이니까. 오늘은 또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안개로 잘 보이지도 않는 황량한 산길을 오르려니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불안함과 막막함이 또다시 찾아온다.


한 시간을 오르니 오늘 걷는 길 중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때마침 안개가 걷히고 산세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어느새 산자락에 서 있었다. 겹쳐지고 또 서로 이어진 능선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곳. 시선은 자꾸만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또 돌았다.


산의 풍경이 분명 처음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매번 설레는 걸까? 힘들지만 결국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수줍게 웃고 싶어 진다.


"언니 여기 너무 멋있어요."


뒤따라 올라온 소은의 표정도 몽글몽글 꾸밈없이 새하얀 눈 같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둘 다 뭔가 촌스럽지만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이 사진이 썩 마음에 든다.





이토록 아름다운 산자락에 있는 엘 아세보(El Acebo de San Miguel). 이제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기에, 그전에 쉬어갈 수 있도록 이곳에 존재하는 이 작은 마을이 소중하고 고맙다. 오늘은 잠시 쉬어 가지만 다음엔 하룻밤 보내고 싶은 곳이다.


오늘도 이슬에 젖은 옷을 벗어 툭툭 털고 따듯한 커피를 시킨다. 메그는 거의 매일 아침 로컬 빵에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얹어 먹는다. 소은은 그때그때 다른데 오늘은 또르띠야를 시켰다. 나는 뭘 먹고 걸으면 오히려 걷기가 힘든 편이라 아침은 사 먹지 않는다. 가끔 아침 식사가 너무 많이 나오면 그들의 양식이 나에게 조금 오기도 하는데 오늘 바가 양이 아주 많은 집이었다. 두 명 다 나에게 조금씩 덜어주니 거의 1인분 양의 식사가 되었다.


달걀로 만든 또르띠아는 말할 것 없이 훌륭한 아침 식사이고, 메그가 먹는 것은 "빤 꼰 또마떼"(Pan con Tomate)라는, 빵에 토마토를 곁들여 먹는 스페인식 간단 아침 식사다. 빵은 보통 바게트에 먹는 것 같지만 그때그때 지역 빵이 있다면 그걸로 먹을 수 있었다. 직접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일회용 잼처럼 마트에서 만들어 파는 토마토소스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취향에 따라 올리브유를 추가 요청해 먹기도 하고 소금이나 후추가 있다면 조금 첨가해 먹기도 한다.

까미노에서 처음 알게 된 음식인데 잼이나 버터보다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발라 먹는 것이 건강하고 맛도 훌륭해서 한국에 가면 가끔 이렇게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른 날 먹었던 빤 꼰 또마떼



산을 좋아하는 산사람

초반의 파노라마 광경과는 달리 후반전은 정신없이 하강하는 내리막길이다. 이런 급은 첫날 피레네와 둘째 날 수비리 가는 길에 만난 내리막길과 견줄 만한 정도의 급급 내리막이었다. 후후.. 하지만 예전의 내가 아니지. 그때에 비하면 이젠 제법 요리조리 돌을 잘도 피해 가며 빠르게 내려갈 수 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내리막은 힘들다. 돌멩이에 몇 번이나 발목이 휘청거렸으니 말이다.


내리막이 끝난 곳에는, 오래된 성당을 시작으로 옛날 모습이 그래도 잘 보존되어있는 듯한 멋진 마을로 이어졌다. 바로 몰리나세까(Molinaseca)마을이다. 성당을 지나 돌다리가 보이자 강가를 따라 들어선 건물에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에는 윤슬이 조용히 반짝거린다.


평화로운 이 마을이 오늘 묵을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산을 좋아하는 '산사람'인가 보다. 산속에서 만나는 모든 마을이 전부 좋고 다 머물고 싶은 걸 보니.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생기는 까미노. 산티아고 가는 길. 26일째.

포세바돈에서 몰리나세까를 지나 폰페라다로 가는 중이다.





오늘은 소은과 잠시 헤어진다. 우리와 달리 소은은 공립 알베르게로 예약했고, 내일 목적지도 달라서 지난번 메그처럼 3일 후에 다시 우리와 만나기로 했다. 까미노에 오면 꼭 들르고 싶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작은 마을에서 소은은 잠시 혼자만의 귀한 시간을 가지게 되겠지.


우리의 숙소는 다인실이라는 것만 빼면 새로 지어진 호텔같이 아주 하얗고 깨끗한 곳이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의 고난도 내리막길이 아무래도 몸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왜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지치고 예민해진 우리는 서둘러 일과를 마쳤다.


배고픈 우리와, 떨어져 있는 소은과, 다리가 아픈 나와, 신발 때문에 시내로 나가야 하는 메그와, 은행에 가야 하는 소은. 우리는 모두 지치고 배고프고 피곤하지만 각자 할 일이 다르기도 했기에 일분일초 예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그런 하루였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어긋났던 타이밍. 뭔가 대화의 방향도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 이럴 땐 말을 아끼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동행에는 서로 노력하는 것이 있을 테고 그 노력이 때론 몹시 피곤하니까.


숙소에 남아 조금 쉬다가 근처만 돌아볼 심산으로 어슬렁 산책을 나왔다. 텔플기사단의 성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들렀는데 나 같은 마음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까미노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신사 아저씨 미카엘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프랑스 이브 아저씨는 성 위에서 탈춤 같은 걸 추며 반겨 주었다.


슬슬 저녁때가 되어 소은이 점찍어 둔 식당에 들어가 먼저 앉아있기로 한다. 성 바로 앞에 있어서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배고프니 점저를 먼저 먹기로 한다. 버거와 칩스에 맥주를 홀짝거리다 보면 약속한 시간에 친구들이 오겠지.





나도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일 테니


그렇게 앉아 있는데 저기 낯이 익은 순례자가 걸어온다. 레온 이후에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인데 내가 인사해도 한 번도 받아주질 않던 사람. 순례자 배낭을 메고도 왼쪽 손에 작은 배낭을 꼭 손으로 들고 걷는 사람. 한 번도 웃는 걸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사하길 포기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올라" 하고 인사를 해버린 것이다.


어?

그런데 이 아저씨 웬일인지 환하게 웃고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분명 '올라'는 아니었고.. 어쩌면 '차우'였을까? 뭔가 두 글자의 유럽말로 인사해 준 그 사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오니 처음엔 당황스럽다가 곧이어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아저씨는 그냥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구나. 영어나 스페인어도 못해서 인사도 못한 것이었어. 어쩌면 나 같은 동양 여자와 대화해 본 적도 없을지 몰라. 무뚝뚝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수줍고 착한 사람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까미노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 모두가 친절하지도 않고 모두와 내가 잘 맞는 것도 아니다. 당연하다. 개인적 연유와 사연을 품고 오는 길인데 모두가 친절하게 친구를 사귀라는 법도 없다. 누군가에겐 여행이고 누군가에겐 고행의 길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평온하게 산책하고 누군가는 속죄의 마음으로 걷는다. 단지 저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좋은 사람이고 그 반대라고 나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다. 나도 사실 순례길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Y에게 나는 오지라퍼 꼰대였을 것이다.


그래. 나도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야. 알고는 있는데 새삼스럽게 눈물이 날껀 뭐냐. 그 와중에 입에 문 버거는 직화 향이 나는 것이 맛있어가지고 깜놀. 울다가 웃음이 다 날 정도로 맛있다. 울다가 웃다가 혼자서 그러고 있는데, 데카트론에서 만나 함께 돌아오던 소은과 리카르도가 자리로 온다.


서둘러 눈물을 찍어 닦고 말했다.

"이 햄버거 진짜 맛있어. 배고프면 추천!"


함께 맥주를 마시는데 리카르도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에게 닥친 안 좋은 모든 것을 그의 덥수룩한 수염에 담으며 걷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 수염을 자를 것이라고 했다. 안 좋은 기억과 시간 모두 수염과 함께 날려 보내고 싶다고 했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그가 상처도 있고 속도 깊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쓰며 살았을 젊은 그가 안쓰럽고 애틋했다.


리카르도는 먼저 숙소로 떠나고 소은과 남아서 메그를 기다린다. 필요한 것을 찾으러 시내를 헤맨 메그는 별 수확 없이 돌아왔다. 샐러드를 먹는 메그 옆에서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숙소로 함께 돌아왔다.


다인실에 함께 묵는 미국 아저씨가 까미노에 왜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지 물었다. 이젠 이런 질문에도 레벨업이 되어 웃으며 도리어 질문으로 답한다.


"Why not? "  = 까미노 이렇게 좋은 곳인데 한국 사람이라고 못 올 이유가?


아저씨는 잠시 당황해하며 미국인들은 영화 (아마 "The Way")때문에 많이 오기 시작했다며 한국도 방송프로그램 때문이지 않냐고.

그러니까. 할아버지에게 이미 예상 답변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지요. 내가 무슨 답을 해도 방송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면서.


이런 대화는 피곤하고 의미 없다.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고 대화에서 빠져나온다.


감정 기복이 좀 있었던 하루였다. 이런 날은 말을 아끼고 가만히 지나 보내야 한다.

무탈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살아있다. 나는 오늘도.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Gu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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