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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Jul 18. 2023

물고기같이 파닥거리는 저 힘찬 빨래들처럼

Astorga - Foncebadón

아스또르가 - 포세바돈


해를 닮은 사람들

"쥐였어! 이만한 쥐가 죽어 있었다고오~!"


셋이 나란히 걷는 아스또르가의 어슴푸레한 아침. 갑자기 소은이 비명을 지르며 놀라 뒤로 숨는다. 

거의 동시에 곁눈으로 얼핏 봤는데 고양이나 비둘기인 줄 알았다. 쥐가 저렇게 크다고...? 언빌리버블.. 소은은 차라리 대담한 편이다. 내가 소은이었다면 더 큰 비명을 지르고 까무러치고 자빠졌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쥐도 우릴 멈추지 못해. 우리는 계속 걷고 있었다. 


삼십 분쯤 걸었을까.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작은 교회에 불이 켜져 있다. 발데비에하스(Valdeviejas)라는 마을인데 이 교회가 전부인 것만 같이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새벽에 불 켜진 교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도 짧은 기도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늘 계속 오르막길이던데.. 무사히 부엔까미노. 


레온에서 까미노를 시작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인지 요 며칠 사람이 많아진 느낌을 받았다. 모두 한길을 걷는데 앞에 한 명이 뒤돌아보면 뒤에 사람들도 도미노처럼 연달아 뒤돌아보게 되는 콩트 같은 상황도 벌어진다. 다들 해가 만들어 내는 진풍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김없이 맞이한 해.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오늘 해를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돌아서 해를 볼 생각도 못 했다. 


기대와 희망, 절망과 적막을 동시에 가진 그 얼굴을 보며, 내가 죽을 때 저 얼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 이들도 부디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으로 산으로 

아스또르가에서 포세이돈까지 가는 길에는 꽤 여러 마을을 거치게 된다. 출발한 지 두 시간여 만에 도착한 산따 까딸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에는 태극기가 걸린 바가 최초로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들어가고 싶었지만 첫 번째 바는 대부분 인기가 많아서 우리는 두 번째 바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 마을은 꽤 오래되고 전통 있어 보이는 건물들이 많았다. 주로 돌로 지어진 건물과 돌담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한국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초가나 돌담을 자연스레 떠올릴 만하다. 바로 다음 마을 엘 간소 (El Ganso) 역시 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민가들을 보며 걸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마을마다 오래되고 비밀스러운 전설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오르막이 조금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바로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소은의 정보에 의하며 이 마을에 한국 라면과 김치를 파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중간에 헤어지더라도 이 마을 식당에서 반드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니 여기서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부산 부부 쌤들이 저기서 손을 번쩍 들고 걸어오는 나를 반겨주시는 게 아닌가!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내 얼굴에 큰 웃음이 걸린다. 

잘 오셨군요! 오랜만에 반가워요! 

라면 파는 곳이 있어서 거기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거기 라면이고 김치고 다 떨어졌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하신다. 어이쿠. 친구들이 실망하겠는데 어쩌지.. 일단 약속은 했으니 접선 장소로 향했다.  


메그와 소은은 내 앞뒤 5~10분 간격으로 도착했다. 역시나 엊그제 라면과 김치가 모두 팔려 솔드아웃이라고 한다. 김샜네 김샜어. 여기가 까미노 길에서 15분 정도 벗어난 곳에 있어서 돌아갈 생각에 더욱 아찔해진다. 어쩔 도리가 있나. 허탈한 우리들은 콜라나 한잔하고 초콜릿으로 당 충전한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냥 눈물이 나요

신비롭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라바날 데 까미노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른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포세바돈, 프랑스 까미노 길 중에 가장 높은 고도에(약 1,400m) 위치한 산중 작은 마을이다. 이미 꾸준히 오르막길을 올라왔기 때문에 마지막 한 시간을 제외하고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벌써 꽤 산중으로 들어온 것 같다. 작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지리산 대피소 못 가봤지만) 지리산 대피소에 온 것 같은 이 정겨운 느낌은 뭘까? 사람이 떠나버린 폐가들도 몇몇 지나고 저 꼭대기에 있는 이 마을이 나는 벌써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느닷없이 눈물이 터졌다. 


그냥 마을에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렇게 터져 나왔다. 무슨 세상의 놀라운 비밀 하나 알아챈 것 마냥. 깨달음이라도 온 것처럼. 이상한 벅차오름이 갑자기 나를 흔든다. 


이런 높은 산에 오른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아- 나는 그렇게도 산을 사랑했던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이것이 후회인지, 감동인지, 서러움인지, 성취감인지 모를 눈물이 왜 갑자기 여기서 터져 나온 것일까? 


알베르게에 들어서는데 부산 부부 선생님들이 체크인하고 계신다. 선생님들을 보니까 반가운지 또 눈물이 났다. 


"아니, 왜 울어요~?"


"모르겠어요. 올라오는데 여기가 너무 좋아서 그냥 눈물이 다 나요.."


나는 포세바돈 이 마을이 좋다. 알만큼 좋냐면 이유를 알 수 없이 울 정도로 좋다. 지금까지 까미노에서 거친 마을 중에 가장 좋다. 여기서 며칠이고 한동안 머물고 싶을 정도로 좋다. 그 이유는 나도 모름. 




오늘은 운이 좋다. 우리가 묵는 8인실 방에 전부 아는 사람뿐이다. 프랑스 이브 아저씨, 포르투갈 리카르도, 부산 쌤들, 메그, 소은, 나 그리고 마지막 한자리는 아직 비어 있으니 누군가 곧 오겠지. 


라면을 못 먹었으니 점심은 거하게 먹기로. 전망이 엄청 좋은 옆 알베르게로 가서 메뉴델디아를 시켰다. 야외 자리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람이 좀 불었지만 햇살이 아주 좋았고 고양이 두세 마리가 볕이 있는 곳을 따라 어슬렁거린다. 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경기도 양평 깊은 산골의 크고 전망 좋은 카페와 어딘지 비슷해 조금 웃음이 나왔다. 


야외에 리카르도와 함께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제대로 인사 나눈 적은 없는데 여러 번 마주칠 때마다 기분 좋지 않던 사람이다. 그녀와의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라 메그와 소은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다. 모두가 그녀를 알고 있었고 의아한 지점이 하나쯤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추측은 저 사람은 여자를 싫어하거나 아시안을 싫어하거나 아님 아시안 여자(둘 다)를 싫어하거나 중의 하나일 거라는 거.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에게만 유독 인상 쓰며 차갑게 굴 이유가 무엇일까? 


신기하게도 불현듯 엄습해 오는 불안감. 저 사람 우리 방 남은 마지막 침대로 오는 거 아니야? 

그렇다. 재밌게도 꿈은 이루어져.. 아 아니,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물고기같이 파닥거리는 저 힘찬 빨래들처럼

산중이라 저녁이 되니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습도도 높아져서 빨래가 말랐을지 걱정이 되어 가보았다. 빨래는 포세바돈의 비경을 배경으로 아직 축축한 채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까미노 첫날부터 내가 아주 좋아하는 풍경이 있다. 바로 제멋대로 널려있는 빨래들이다. 때로는 수평선처럼 긴 줄에, 때로는 날개처럼 펴지던 건조대 위에. 각양각색의 빨래들이 바람에 날리는 걸 가만히 보는 게 좋았다. 빨래들은 물이 뚝뚝 흐르는 힘찬 물고기처럼 바람 따라 파닥거리며 생기가 넘쳤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건물들을 꽤 지난다. 보기엔 버려진 곳 같지만 더러 거기에 사람이 산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면, 그곳에 빨래가 걸려있었으니까. 

높은 곳에서 만세를 부르고 깃발을 흔드는 빨래들. 

여기 사람 살아요. 내가 살고 있어! 외치는 생명의 울림이 들려온다. 

빨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증거다. 사람이 거기 있다는 흔적이었다. 그럼 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삭막한 길도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여기 포세바돈 같은 곳이 그렇다. 한동안 버려진 집으로 가득했다는 이곳에 순례자 수가 늘면서 마을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약간은 황량하고 쓸쓸한 이 마을이 산속 비경이 대비되면서, 누군가 사람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동화처럼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버려졌던 이곳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외치는 빨래들이 파닥거리고 있다. 이제 아무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오늘 우리 방의 주제는 내일 이 마을에 있는 철의 십자가를 보기 위해 몇 시에 일어나 출발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두가 일출과 함께 철의 십자가를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8시쯤 해가 뜨는데, 철의 십자가는 여기서 30분도 채 안 걸린다고 하니 7시쯤 일어나 준비하고 가면 될 것 같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대화를 가만히 듣던 부산쌤이 자리에 누우며 나만 들리게 말씀하신다. 


"내일 안개 때문에 어차피 해는 보기 어려울낀데.."


앞서 알게 된 듯이 부산쌤은 항해술을 가르치는 분이다. 나는 항해술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항해사는 만화책 <원피스>의 나미뿐이라서, 나미는 몸으로 날씨를 막 예측하고 그런.. 기상과학의 천재니까.. 아무래도 쌤도 그런 감각이 뛰어나지 않겠느냐- 하는 추측(상상)을 (내 맘대로)해본다. 


그러니께 내일 일출은 기대 말고 기냥 푹 늦잠 자는 걸로오-

이렇게 정다운 까미노 친구들과 함께 나의 까미노 최애 마을 포세바돈의 아쉬운 밤이 깊어져 갔다. 

쿨쿨 Zzz..





bonus!

+ 알베르게 : Albergue de Peregrinos La Posada del Dru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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