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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Jul 11. 2023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할 때가 있다

San Martin Del Camino - Astorga

 산 마르띤 델 까미노 - 아스또르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할 때

다양한 계절을 만날 수 있었던 스페인의 9월도 이제 일주일 정도 남겨두고 있다. 해를 피해 걷던 초반에 비해 이제는 해를 따라 걷기도 한다. 오늘은 무척 습하다. 땀이 아닌 습기에 옷이 눅눅해질 정도로 습해서 더욱 춥게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순례자들의 어깨가 추위로 점점 단단하고 웅크려 들고 있었다. 


아침은 여전히 힘들다. 누적된 피로로 온몸이 부어오는 아침. 신발은 정말 큰 사이즈로 신고오세욤. 매일 아침 퉁퉁 부은 발을 등산화에 찔러 넣어야 하니까. 발바닥은 아직도 찌릿찌릿하고 무릎을 안 쓰려고 돌려쓰고 있는 다른 근육들이 돌아가며 아프다. 


하지만 이런 통증에 이제 좀 익숙해졌다. 아프다고 칭얼거려도 받아주는 사람 없고 나 대신 탓할 대상도 없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고통이니 더 할 말도 없다. 모두 감당하고 가는 것이다. 까미노가 주는 시련을 감당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즐거우면 좋지만 즐겁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고통도 외로움도 매일 존재하는 건데, 그걸 매번 피할 수만은 없다. 감당해도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이다. 


비를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떠올려 봐도 비를 피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을 할 때, 조금 경력이 쌓이고 일에 자신감이 생겼을 무렵 누가 비를 뿌릴 것 같으면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괴로워서 온 힘을 다해 피하려고 했다. 가끔 그렇게 비를 피하게 되면 내 처세술에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거 피하려고 애쓸수록 소모되는 건 나 자신일 뿐이다. 금세 지치고 방전되어 버리고 마는걸. 


애써 한두 번 피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다음 곱절의 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 어쩔 때는 이건 그냥 맞아야 하는 비라는 걸 알게 되곤 했다. 차라리 지금 맞는 게 나아. 그럴 땐 에라 모르겠다 비를 맞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순간의 괴로움은 크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고 비는 멎는다. 괴롭고 쪽팔리고 실수했거나 억울한 거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 그저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조급했던 게지. 나도 알아. 

세상이 만만친 않으니까. 조급한 너의 마음 당연해. 


이 길에 주어진 것들. 모두 삶의 일부일 뿐이고 순환되고 있으니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까미노에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전혀 달랐던 3명의 속도가 이젠 제법 맞아가고 있다. 어제는 서로 속도를 맞춰주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누가 누구에게 맞춰주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맞아가는 느낌이다. 처음엔 서로 배려하고 폐 끼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이젠 서로 조금씩 의지도 하고 불평도 늘어놓으며 투닥거리는 사이가 되어감을 느낀다.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의 어느 바에 멈추어 쉰다. 이슬 맺힌 옷과 얼굴을 털어내고 눅눅한 신발을 고쳐 신는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다소 공기가 무겁고 사람들은 지쳐 보인다. 바의 정원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날씨 때문인지 닫혀 있었다. 정원에는 처음 보는 문양의 어여쁜 닭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인가 닭인가 싶게 생긴 조류도 있었다. 자유롭게 거니는 걸 보니 정원의 주인은 바로 너희들이로구나. 겁이 많아 고양이도 만지지 않는 나는 이렇게 밖에서 눈으로 보는 것으로 족하다. 


이 마을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 까미노 프랑스길에 있는 다리 중 가장 긴 돌다리가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 긴 세월 속에서 무너지고 재건되는 수난을 수없이 겪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오래될수록 여러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 어떤 물성에도 영혼을 불어넣는 힘이 있다. 


돈 수에로라는 기사가 수많은 기사와 한 달 동안 결투를 벌인 곳이 바로 이 다리라서, 이후에 저런 이름(명예로운 걸음의 다리)이 지어졌다고 한다. 피와 결투의 현장이라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차마 '이쁘다'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다리 앞에 서자, 때마침 해가 다리 위에 길게 늘어서 앞마을까지 비추며 갈 길을 터준다. 해가 터주는 이 예쁜 다리를 아니 건널 수는 없지. 

막상 다리 위를 걷는데 새로운 다리 이름이 떠오른다. 내가 지은 이 다리의 이름 바로 "지압 다리" (엄마가 좋아하겠다). 돌다리의 돌멩이들이 안 그래도 아픈 발바닥을 쑤셔대서 얼른 지나갈 마음이 간절해졌음. 





순례자들의 만남의 광장

추웠던 날씨가 걷기 딱 좋은 날씨로 변해 간다. 저기 구름 몰려있는 도시로 도시로 향해있는 길. 

황토색 산길을 한참 걸으니 아헤스 가는 길에 만났던 오까산이 떠오른다. 삭막했던 산길에서 만난 어느 예술가의 재치 있는 작업은 내 마음을 편하게 했었다. 로그로뇨 갈 때 만났던 어느 산길도 떠오르게 했다. 거기에도 어느 예술가가 기타 연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왠지 비슷해서 떠오른 두 곳 모두 뜻밖의 즐거움이 숨어있었으니, 이곳에서도 뭔가 선물 같은 일을 만나게 될지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도 역시나 순례자들을 위한 선물 같은 쉼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그동안 유튜브에서, 블로그에서 보던 도네이션 쉼터가 바로 이곳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까미노 최애의 쉼터라고 손꼽히던 곳이다. 


먼저 도착한 메그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히피스럽게 꾸며진 공간이 멋져서가 아니라, 정말 많은 순례자가 그곳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풍경과 무척 어우러져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만남의 광장이기도 한 이곳. 인사 나누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또 슬쩍 빠져나와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힌다. 아는 얼굴이 저기서 걸어오면 메그와 소은은 반가워 그들을 맞이하고 안부를 나눈다. 그런 장면을 눈에 오래 담고 싶어서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조금 더 걸으면 누군가를 기리는 십자가 산또 또리비오 십자가(Crucero De Santo Toribio)에서 멈추게 된다. 그 너머 아래로 아스또르가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다음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장관이다. 걸음 하나에 자꾸 멈추게 되고 감탄을 연발하게 되는 풍경이 계속되었다. 


내려가면 산 후스또 데 라 베가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을 지나고 녹색 철교를 지나 또다시 올라가야 아스또르가 도시에 진입할 수 있다. 한눈에도 이 도시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 수 있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감탄하게 되는 곳이다. 눅눅하고 무겁던 아침과는 달리 어느새 볕은 뜨겁고 마음은 까미노 첫날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 아스또르가의 일요일

좀(?) 가파른 오르막길을 간신히 올라가면 그곳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원래 오래된 병원 건물이었다는 이곳은 방들이 많았고 크기에 따라 2인에서 8인까지 한방에서 자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규모가 크고 부족한 것 없이 모든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오르막길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훌륭하다. 전망 좋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어제 사다 놓은(전자레인지 없어서 못 먹은) 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전망 좋은 곳에서 소은이 사다 준 맥주를 마시며 멍때리는 시간을 가져보자. 우하하. 좋구나. 


자 한숨 쉬었으니 이제 마을 구경을 나서볼까? 

에스또르가는 로마 유적이 많이 남은 곳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아스또르가 대성당은 11세기 로마 시대에 시작해 여러 세기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다양한 예술성과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가우디가 지은 주교궁도 있고 초콜릿 산업이 발달한 것으로도 유명한 나름 관광지라고 한다. 메그는 초콜릿 박물관에 가고 싶었으나 오늘은 일요일, 문을 열지 않아 아쉽다. 가우디 건축은 한눈에도 다른 것들과 달라서 알아보기 쉬웠다. 사진 찍을 때 한쪽 다리를 구부리며 허리에 손을 얹는 유럽 언니들의 한결같은 포즈를 우리도 한번 따라 해 본다. 그들은 모델 같은데 우리는.. 뭐.. 나름 귀엽.. 뭐래. 


한국과는 다르게 일요일 쉬는 스페인 관광지 아스또르가는 한적하니 셋이 산책하기 좋았다. 산책하다 들른 카페에 위스키를 탄 에스프레소가 있어서 주문해 본다. 이런 날씨에 제법 어울리는 맛이다. 


숙소의 방은 4인용이었는데 우리가 3명이니 나머지 한자리가 비었다가 폴란드 순례자 R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초면인데 소은은 한번 인사 나눈 적 있다고 한다. 조금 쌀쌀맞은 그녀에게 나는 왠지 거리를 두게 된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들이다. 그녀도 나도 모든 사람과 친해지거나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다. 본능적으로(혹은 경험적으로) 땡기지 않는 것(혹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너무 애쓰지 않고 적당히 스스로를 방어하며 피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산을 오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한 아스또르가의 밤이 깊다. 

(콩닥콩닥)






+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de Peregrinos Siervas de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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