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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Sep 25. 2023

굿 바이 레온,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들

Leon

레온


굿 바이 레온,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들

두 번째 레온의 날.


아침 일찍 소은, 메그와 함께 데카트론으로 향한다. 근처라고 하지만 40분여를 걸어가야 했다.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침낭 없이 견디던 소은은 두툼한 침낭을 샀고 나는 기모레깅스와 플리스 조끼를 구입했다. 메그는 신발에 구멍이 나서 비가 더 잦다는 레온 이후의 구간을 대비하고 싶어 했다. 결국 마땅한 것이 없는지 도시로 돌아가 필요한 것을 찾아보겠다고 먼저 도심 쪽으로 출발했다.


화장품 가게에서 필요했던 크림까지 구입하니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레온 대성당과 인근 건축물 거리를 걷는다. 정처 없이 걷다가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 뭐를 먹을까 하는 순간 메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 호스텔에 돌아왔는데 넌 어디야?'

'나 대성당 근처. 근데 나 배고파.'

'나도'

'그럼 뭐 좀 먹자. 뭐 먹을까?'


점심 메뉴를 오픈한 곳을 찾다 보니 대성당 바로 앞 이탈리안 식당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먹게 되었다. 대성당이 바로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데이빗이 같은 숙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방에 올라가니 그렉도 같은 방으로 체크인을 한 상태였다. 우리가 이틀에 가는 거리를 하루 만에 와 버렸으니 매일 길에서 만나던 친구들도 하루씩 차이가 나버린 것이다. 앞으로 마주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그들을 레온에서 만난 건 내겐 선물이었다.


만나는 이도 있지만 떠나는 이도 있는 날. 

오후에 레온을 떠나는 이반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모두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간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고 호스텔에서 담담히 그를 보낸다.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알 수 없게 불안했던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끄끝내 묻지는 않았었다.


잘 가, 지구 반대편에 사는 너와 잠시 함께 걸을 수 있어 즐거웠어. 고마워.


어제 이후로 내 눈을 피하던 Y는 오늘은 레온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잔다고 호스텔을 떠났다. 어쩌면 Y와도 이렇게 이별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방에 묵는 데이빗, 메그, 소은, 그렉 모두 여행자 모드로 레온의 타파스 거리를 즐기러 나가고 오늘도 나는 혼자 와인 한 병을 사서 숙소 중정에 자리를 잡았다.


호텔 중정에서 하늘을 보면 마치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작품 같이 프레임 안에 하늘이 보인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


그곳에서 하늘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데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늙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늙지 않는 이는 끔찍하다. 나는 청년같이 사는 어른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그녀는 아직 청년 같음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으나 그의 욕심도 청년 같았고 그의 질투도 억울함도 청년 같아서 주변이 괴로웠다. 나는 그가 오래전 그 자리에 머물러 자라지 못하는 억울하고 초라한 영혼 같아서 가여웠다.


"그러니까 내일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순간의 현실을 잡으세요.

지금 젊음을 열심히 살아야, 늙을 줄도 알고

열심히 늙음을 살아야, 죽음의 의미도 압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야. 그랬을 때 대담하게 정말 가고 싶은 길을 가세요. 쓰러져 죽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으로 가세요. 내 삶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남이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어령 선생님 영상 중-



내가 원하는 삶. 내가 가고 싶은 길.

언제나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던 어설프지만 당당했던 지난 시간들.

크고 작은 방향들, 순간의 선택들 속에 유난히 이것저것 부여잡고 애쓰며 살았다. 


인생의 한 챕터를 끝내고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려고 하는 지금, 이제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내가 되고 싶다. 유명한 감독이 아니라, 멋있는 기획자가 아니라, 좋은 팀장, 부장, CEO같은게 아니라, 

그저 내가 되고 싶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매일 메세타를 걸으며 자주 마음이 깊어지고 방황했던 시기를 겪었다. 이제 까미노도 내 인생처럼 또 다른 챕터로 넘어가려고 한다.

레온의 마지막 밤. 내일은 다시 순례자가 된다. 일단 나는 '쓰러져 죽더라도'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셈이다.


안녕, 레온

안녕, 그 이전의 시간들


그리고 메그와 소은과 나, 

3명의 본격적인 까미노 후반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대하시라 후반전 개봉박두

두둥.





bonus!

-레온 숙소 : Hostel Quartier León Jabalquinto
-이어령 선생님 영상 : https://youtu.be/Q2BHEQpZ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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