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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Jun 27. 2023

영원한 건 없어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수밖에

EL Brugo Ranero - León

엘 부르고 라네로 - 레온


37km의 부담감을 안고 일찌감치 일어난다. 오래된 건물의 삐그덕 비명소리가 특히나 많은 곳인데 방들에 가벽만 있을 뿐 천장은 다 뚫려 있는 구조라서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친구들이 깨났는지 살펴본다. 아직 자는 듯 보이는 친구들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대니 부스럭 실눈을 뜨며 일어난다.


부르고스 이후로 같은 곳에서 지내다 보니 이반이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좀 실례 아닌가 싶어서 어제저녁에 알람 맞추지 말라고 말했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일찍 일어나? 나는 못 일어나."

이반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다 알람 맞추지는 않잖아."

"그래? 그럼 네가 나 깨워줘."


깨워달라는 말에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내가 왜? 여기선 서로 깨워주지 않아. 스스로 일어나고 출발하는 거지. 혹시라도 내가 늦게 일어나면 너까지 늦어지는 거잖아. 그런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안돼. 매번 내가 널 깨워줄 수는 없어."

"그럼 나도 모르겠어."

어쩌라는 건지 곤란하다는 듯 이반은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이놈의 오지랖. 나도 참 이럴 때 보면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속으로 흉 좀 보고 모른 척 넘어갔을 텐데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이반은 내 말이 잔소리처럼 느껴졌겠지. 어쩜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5시 33분 알베르게를 나선다. 37km에 임하는 오늘의 걷기 전략은 각자의 속도를 지키고 걷는 것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살피며 안전히 걷기. 레온이 워낙 큰 도시이니 레온에 도착하면 시내에서는 버스를 타고 호스텔까지 오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각자 원하는 대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어두울 때 속력을 내는 메그와 나, Y는 한 그룹이 되어 13km 거리에 있는 도시 렐리에고스(Reliegos)의 첫 번째 바에서 멈추었다. 출발한 지 2시간여 만에 13km를 돌파했으니 꽤 빠르게 걸은 셈이다.

커피를 시키고 앉아있는데 올리를 만났다. 어? 그런데 표정이 어둡다.


"올리! 오늘 어디서 출발한 거야?"

"난 어제 여기 도착해서 여기서 잤어. 근데 다리가 너무 안 좋아서.. 여기서 멈추기로 했어."


놀란 눈으로 찬찬히 다시 그를 보았다. 그래, 뭔가 걷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너무 무리해서 걸었나 봐."

"그래 무리해서 더 걷지 말고 일단 돌아가서 치료해. 까미노는 언제든지 또 오면 되잖아. 네 다리가 가장 중요하지."


4일 전 프로미스타에서 올리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다고 했다. 어제 이 마을에 이미 도착했으니 그동안 남들보다 더 많이, 빨리 걷느라 결국 다리에 무리가 갔나 보다.

개구쟁이 같던 그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너무도 쓸쓸히 앉아서 택시를 기다린다. 그 쓸쓸한 표정을 보니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자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혼자 아픔을 감당하고 기도하며 걸었을 그를 생각하니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웃으며, 부엔 까미노!


반가웠어요 올리. 까미노 첫날 론센스 바예스 숙소에서 만났을 때 설레어하던 표정을 기억해요. 프로미스타에서 나누었던 대화들도 즐거웠죠.

어서 나아서 다시 까미노 걷게 되길 바랄게요.





렐리에고스에서 레온까지 남은 거리 25km.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한 시간 정도(6km) 걸으니 조금 큰 규모의 마을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를 만난다. 메세타를 걷다가 오늘은 요런 저런 마을 구경을 할 수 있으니 지루하지 않다. 유적지가 많아 보였는데 가볼 수는 없었고 까미노 길에서 볼 수 있는 무너진 성곽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또다시 5km의 메세타를 지나고 도착한 뿌엔떼 데 비야렌떼(Puente De Villarente)에서는 두 번째로 쉬어가기로 한다. 와 힘들다 힘들어. 24km를 걸었는데 오늘 14km 더 가야 하는 거 실화냐.


그래도 부르고스 이후로 잘 보이지 않던 까미노 초반에 만난 친구들을 오늘은 꽤 마주쳤다. 초반의 설레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그을린 얼굴에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이 길에서 재회하였다. 모두가 레온으로 향하는구나. 우리는 까미노 중반기 부르고스와 레온 사이의 메세타 구간에서 살아남아 레온으로 간다.





레온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쉴 곳을 찾고 있었다. 메그의 속도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기에 일찌감치 보내고 혼자 걸었다. 이상하게 쉴 곳이 보이지 않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걸어갔다. 걸음이 빠른 유럽 친구들은 그만큼 오래 쉬기도 해서 나와 서로 계속 지나쳐 갔다.


레온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까미노에서 보지 못한 길이 나와서 지도를 자주 확인해야 했다. 넓은 들판을 지나 드디어 도시로 들어서는데 우리나라 신도시 같은 느낌의 건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대리점이나 큰 가구매장, 대형 창고형 마켓 같은 것들이 많았다. 그늘과 쉴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곳은 없었다.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세워진 파란 철재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고속도로를 건너는 다리로 이어진다. 고속도로를 오른편에 두고 걷다 보면 또 다른 파란 다리(Pasarela del Camino de Santiago)로 이어지고 드디어 레온 도시에 들어섰음이 느껴진다.


더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느 한 공립학교 앞의 벤치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아 죽겠다. 좀 쉬자. 쉬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그제야 그곳이 학교 앞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이 차 안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니 어른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기 내가 왔던 길에서 메그와 Y가 오는 게 아닌가?


"어? 왜 지금 여기 지나가? 벌써 멀리 간 거 아니었어?"

"우리 힘들어서 중간에 한 번 더 쉬었어."

"어디서? 나도 쉬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까미노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하나 있었어."


역시 나만 힘든 건 아니었다.


메그와 Y를 보내고 조금 더 쉬다가 일어났다. 마침 하교하는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섞여 걸으니 기분이 묘하다. 누군가의 평범하고 바쁜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


오른쪽 건너편으로 KFC 건물이 보인다. 역시 대도시구나! 어느 블로그에서 봤는데 KFC가 나오면 레온에 거의 다 온 것이라고 했다. 반가웠다.

자, 여기는 레온이다.




레온에서 벌어진 일


오후 2시 22분. 호스텔에 들어가니 메그가 아직 체크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몰리니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듯하다. 5분 정도 대기후 메그와 함께 체크인 안내를 받았다.


더 걸을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우리는 씻고 일단 대성당 근처로 나왔다. 장시간 뭘 먹지 못한 나는 마트에서 뭐라도 사다 먹어야 했다. 거리로 나와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 둘이 콘 하나씩 들고 그냥 거리 어디에 앉아버렸다.


해냈구나 37km. 다시는 이렇게 걸을 일은 없을 테지만 이 정도 걸어도 무사한 걸 알았으니 잘했다. 뿌듯함과 뽀송함과 달달함이 밀려온다.


프랑스 까미노의 2/3 지점에 있는 대도시 레온. 많은 순례자들이 하루 더 쉬어갈 정도로 크고 매력적인 도시. 특히 레온의 타파스바는 술을 시키면 안주는 랜덤으로 그냥 내주기도 하는 그런 화끈한 곳이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 타파스 거리에 모였다. 오늘은 이반과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한다. 일정상 버스 타고 사리아로 넘어가서 산티아고까지 걷는다고 한다. 길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다.

한차례 배불리 먹고 마시는 동안 작은(?) 사건이 있었다. Y에게 화가 나서 좀 모질게 말을 해버린 것이다. 까미노에서 깊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던 친구였는데. 사정은 이러했다.


옆 테이블에 스페인 여행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몇 개월 살았다며 Y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침 메그와 소은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그 대화에 끼진 않았으나 하필 내 자리가 바로 옆이라 그들의 대화가 어쩔 수 없이 들려왔다.


일본 어느 지방에 가봤냐, 거기 가면 예쁘고 끝내주는 여자들 많다며 남자들의 대화를 이끄는 Y의 말과 뉘앙스가 신경이 쓰였다.


사실 Y가 이런 말로 주변을(특히 동양 여자들을) 불편하게 했던 전적이 몇 번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비슷한 실례를 계속하는 것일까? 메그에게 물어보니 일본어로 말하거나 자기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확실히 Y는 영어 할 때 그랬다. 적당히 욕을 섞으며 섹스 이야기가 쿨하다고 생각하는 자유분방한 그의 영어는 마치 갓 어른이 된 철없는 시절의 말투 같았다. 20년 전 호주에서 영어를 배웠던 그때로 돌아가서 스무 살의 Y가 되는 것처럼. 세월 따라 어법도 변하기 마련인데 그의 영어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도 커서 그들과 어울리길 선호했고 그들의 쿨하고 수평적인 문화가 부럽다고 했다. 동양 문화에 대한 불만은 상대적으로 크고 열등하다고 느끼니 그런 것들이 대화 중에 표현되곤 했다.

그런 그가 나는 안쓰러울 뿐이었다. 왜냐면, 그는 지독히도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서양인들에게 ‘동양 여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지 않았다.


"저들에게 일본 여자얘기 좀 안 할 수 없어? 까미노에서 넌 왜 항상 그런 얘기뿐이야?"

"응? 그게 뭐가 어때서..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자연스러운 거잖아.."

생각지도 못한 내 말에 Y는 당황해했다.


“그 말이 아니야. 저들에게 일본이나 한국 여자들에 대해 아는 척 말하지 마. 우리가 무슨 hooker가 된 기분이라고!"


말이 거세지려고 해서 멈추었다. 그도 불편한지 굳은 얼굴이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스텔에서 메그와 소은이 돌아왔고 우리의 저녁은 계속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Y와의 대화는 더 이상 없었다.


사소한 일은 또 하나 있었다. 

이반이 레온에 유명한 빵집이 있다며 메그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본 메그는 "이런 농담 안 좋아해. 나에게 하지 마!"라며 몹시 불쾌해했다. 그 빵집은 남자 성기 모양의 빵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반은 그냥 함께 웃자고 보여준 것일 테지. 메그가 그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문화도 나이도 인종도 세계관도 다른 우리에겐 사실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떤 때는 더 깊어지고 또 어떤 때는 휘청거린다. 선을 볼 줄 알고 지킬 줄 아는 매너란 참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어.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수밖에

2차를 갔지만 이미 마음이 상한 Y와 나 그리고 메그는 신이 날 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때문에 이반과의 마지막 밤을 망칠 순 없으니 애써 기분을 내보는 우리는 으른들이다잉?


간단히 한두 잔만 하고 나온 두 번째 바. 어디로 갈지 거리를 헤매는 동안 우리는 운명적으로 홍콩 친구 포와 또다시 재회한다. 늦은 밤 대도시의 수많은 골목 중에, 메그가 이반이 말한 빵집을 피하고 싶어 후다닥 재끼듯 턴을 했던 바로 그곳에 포 그녀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재회의 순간, 초침은 분명 슬로모션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반, 소은, Y를 뒤로하고 우리는 그대로 포와 어느 타파스 집으로 들어갔다.


서로를 알아본다는 느낌은 아마도 이런 것일 거야. 우리의 대화는 불편함 하나 없이 좋았다. 말주변이 없고 언어가 달라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이들이 고맙다.


하지만 계속 뇌리에 맴맴 도는 Y와의 일.

괜한 말을 한 걸까? 내가 잘못한 걸까? 좀 더 차분히 설명했었더라면 좋았을까?

그 일을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내가 Y에게 모질게 대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는 고백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그 상황이 다시 오면 어떻게 할 거야? 같은 말을 할 거야 안 할 거야?"

포가 다정히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해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마 같은 말을 할걸. 그때로 돌아가도."

"그래 그럼 됐어.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마. 너는 네가 할 일을 한 거야."


포의 말에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을 한 거야. 관계가 무너지는 건 안타깝지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자. 영원한 것은 세상에 없어. 모든 것은 변하지. 그러니 나의 실수는 곱씹되 상황은 받아들여야 해. 그리고 나아가는 수밖에.


포의 숙소는 멀리 있었다. 메그는 혼자 밤길을 가야 하는 그녀가 걱정되어 함께 가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12시가 넘은 레온의 밤거리를 40분 동안 함께 걸었다.


까미노 20일이 되던 날이었다. 






bonus!

-레온 숙소 : Hostel Quartier León Jabalqu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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