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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Jul 04. 2023

삼총사의 후반전은 이제 시작일 뿐

León - San Martin Del Camino

레온 -  산 마르띤 델 까미노



삼총사의 까미노 후반전은 이제 시작되었다

까미노 23일 차. 

레온에서 하루 더 쉬었지만 생각처럼 몸이 가볍지는 않다. 아마 방한으로 사서 입은 좀 두툼한 옷들의 두께감이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까만 아침 속에서도 조명을 받는 레온의 오래된 성들은 유일한 듯 차갑도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과 광장을 지나 레온의 어느 거리에 들어서니 언젠가 보았던 새벽의 홍대거리를 연상케 했다. 어젯밤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술병과 흔적들이 유럽 그 고유한 돌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술과 유흥을 좋아라 하는 한국과 스페인의 정서가 비슷하다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스페인 윈.


자, 예고한 대로 오늘부터 소은, 메그와 나는 삼총사가 되어 까미노 후반전을 시작한다. 앞에는 메그가 뒤에는 주로 소은이 걷는다. 삼총사가 된 첫날이라 그런지 오늘만큼은 서로 걸음을 조금씩 맞춰 주고 있었다. 특히 이반과 여유롭게 걷던 소은과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자주 소은을 돌아보았다.

다소 부산스럽던 5명에서 3명이 되고 보니 조금 쓸쓸했고 조금 안정적인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오랜만에 혼자 걷는 수염 친구 리카르도를 만났다. 묻지도 않았는데 배낭 없이 걷는 이유를 막 설명하는 귀여운 리카르도. 그와 우리는 레온에서부터 서로 적당한 거리를 좁히고 또 멀어져 가며 좋은 동행이 되는 중이다.





아침이 되니 서서히 구름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은 구름이 심상치 않다. 비 소식은 없었는데.. 성난 구름 뒤로는 파란 하늘이 숨어 있으니 곧 구름이 걷히겠다고 리카르도가 말했다.


도심을 벗어날 때쯤 공장들만 들어선 넓은 도로를 한동안 걸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차들로 활발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른 아침이라 다행히 한가롭게 도로  옆을 걸을 수 있었다. 레온 이후의 길은 정말 그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메세타 구간은 이제 정말 끝난 것일까?


이윽고 만난 작은 마을 비르헬 데 까미노(La Virgen del Camino)는 1505년 성모가 발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마을에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기웃거리게 될 성당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만난 오래된 성당과는 달리 최근에 지어진 신식 건물의 이 성당이 꽤 멋스러워 보인다. 


활짝 열려있는 문으로 들여다보니 아침 8시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행자들이야 비슷한 성당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새롭고 멋진 성당을 보니 나쁠 건 없지만, 누군가는 성당의 예전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까미노 길이 두 가지로 나뉜다. 예상하지 못해서 안내판 앞에서 조금 주춤거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왼쪽 우회 길로 가길래 하마터면 나도 그 길로 갈 뻔했지 뭐야. 다행히 가다가 돌아와 표지판을 찬찬히 다시 확인하고 우리의 도착지로 가기 위해 방향을 바로 잡았다.





걸으면서도 오늘 왜 이렇게 다르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레온 이전과 이후의 길 자체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레온 이전까지는 메세타 구간을 겪으며 요동치던 내 안의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덧 생긴 관계들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도 있었다. 그에 비해 오늘은 뭔가 번잡스러운 생각이 줄었다고 해야 할까? 안정적인 멤버와 생활로 접어들면서 까미노의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여행의 들뜨고 흥분된 것들이 일상의 차분함으로 바뀌는 시점.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도 나는 그동안 조금 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길의 중간지점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Valverde De La Virgen)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걸었다. 나는 때때로 소은 뒤에서 걷기도 했는데 나만 속도 조절을 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저만치 보이지 않았을 메그가 오늘은 보이는 거리에 늘 있는 것을 보며 발을 맞춰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을 초입의 작은 상점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잠시 후 리카르도도 이쪽으로 오는 걸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사총사가 된 것 같다. 쓸쓸한 빈자리를 그가 조금은 채워주고 있었다.





12km를 쉬지 않고 왔으니 이제 남은 13km 또한 단숨에 가보려고 한다. 오늘은 길이 평탄하고 어렵지 않으니 충분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요하고 차분한 눈으로, 별생각 말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 충실하며 남은 길을 걸어보자.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 그 뒤로 숨었다 내미는 해.

바람에 반짝이는 풀잎들,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무 그림자가 귀엽다. 

우수수하며 춤추는 옥수수 숲은 부지런하고 쓸모를 잃은 채 서 있는 빈집은 고독하다. 

흥얼거리는 너의 허밍과 낯선 사람의 고단한 발걸음은 썩 괜찮은 하모니가 되곤 한다. 


내 안의 고요함은 주변으로 눈과 귀를 향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영화 <어둠 속의 댄서>처럼 음악이 되는 판타지를 혼자 상상해 본다. 말이 없을것 같은 자연은 사실 각자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화는 조용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소리가 하모니가 되는 순간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춥고 쓸쓸한 건 내 마음이었어

도착한 도시는 매우 춥고 바람이 몹시 분다. 숙소를 향하니 반가운 얼굴들, 메그와 리카르도, 이브가 먼저 와 있다. 알베르게의 시설은 꽤나 낡고 볼품없어 보였다. 깨진 유리창에 바람까지 불어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마저 돈다. 알베르게 주인도 다소 무뚝뚝하다. 커뮤니티 디너 신청을 받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지 한참 고민이 될 정도였지만 결국 다 함께 신청하기로 했다.


배고 고프니 서둘러 상점에 가서 전자레인지용 인스턴트를 사 왔다. 그런데 숙소에 전자레인지가 있었던가? 아뿔싸. 확인 안 하고 산 내 잘못. 돌아와 보니 전자레인지는 없었고 처음 보는 동양인이 과자를 먹으며 말한다.


"여기 전자레인지 없어. 나도 그래서 지금 이거 먹는 중."


그녀는 대만 사람이라고 한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모두 비슷한 처지가 되어 배낭 속 비상식량들을 꺼내어 한자리에 펼친다. 다행히 상점에서 맥주와 과자들을 한 봉지씩 샀으니 적당히 허기를 달래며 스몰토크 시간을 가졌다.


아, 그나저나 방이 난방이 1도 안 될 것 같은데.. 어째 밖보다 숙소 안이 더 추운지 참.. 오늘은 배낭 멘 아래에 있는 경량 패딩을 꺼내 입었다. 이 정도면 잘 때도 입고 자야 할 판이다.

춥고 황량한 곳.. 마을 여기저기를 다녀봐도 상점의 주인만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상냥함을 베풀어 주었을 뿐. 이 마음.. 아니 이 마을은 고요함을 넘어서 쓸쓸하고 삭막했다. 


그러던 중 대반전은 저녁에 일어났다.





다들 배고픈지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식당에 기웃거리고 있었다. 저녁 준비는 아마도 그 무뚝뚝하던 호스트 혼자인지 요리하느라 식당에 집기를 나르느라 바빠 보였다. 누구부터였을까, 순례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릇을 나르고 식탁을 차린다. 배식을 위해 큰 냄비 가득 요리가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하고 춥던 식당에 온기가 넘쳐흐른다. 접시에 따듯한 수프가 채워지고, 마른 잔에 와인이 따라진다.


식탁이 차려지자 호스트가 스페인어로 건배사를 외친다. (다행히 누군가 영어로 간단히 통역을 해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 건배합니다! 그리고 숙소가 상당히 춥지요? 미안합니다. 최대한 따듯해지도록 하고 있지만 아마 오늘  밤은 추울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그가 이렇게나 수줍고 따듯한 사람이었다니! 추워서 심술 났던 내가 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메그와 나는 음식 맛을 보고 놀라 서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다!"

"우리 이거 안 먹었으면 어쩔뻔했어?!"


그가 차려준 단호박 수프와 치킨라이스는 추운 날씨에 제법 어울리게 따듯하고 맛있었다. 따듯한 음식을 먹으니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식사 시간은 각별했다. 이곳은 코로나 때문에 운영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곳곳에 낡은 흔적들이 마음이 아팠다. 내 옆에 앉은 아일랜드 사람은 이 알베르게에 두 번째 왔다고 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느냐고 호스트에게 물었지만 호스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시설은 정말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투박하고 열악한 시설에도 여기 모인 사람들로 더없이 애틋한 공간이 되는걸. 요리 하나에 따듯해지고 별일 없이 행복해지는 밤. 서로 서툰 마음을 나누게 된 저녁 시간.


실은 황량했던 건 이 마을이 아니라, 대도시 레온을 지나고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나도 모르게 쓸쓸하고 헛헛했던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산 마르띤 델 까미노, 이곳은 까미노에서 가장 쌀쌀했던 곳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따듯했던 마을로 기억될 것 같다.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municipal San Martí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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