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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재외동포문학상에 제출한 체험수기



 2016년 7월 결혼 8년 차 두 아이의 부모인 나와 남편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꿈을 향한 결정을 내렸다. 장애인 교육 분야에서 종사하던 우리는 결혼할 때부터 유럽에서 특수교육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결혼과 출산 육아,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관성을 가진 일상을 살아가다보니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야 길었던 준비과정을 마치고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진학할 학교를 찾았고 영어공부에 최선을 다했지만 영국의 모 대학교의 입학 허가증을 받고도 갈 수 없었던 기가 막히고 복잡했던 여러 가지 사연을 경험한 끝에 우리는 헝가리라는 ‘뜻밖의’ 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결정한지 4개월 만에 남편은 우리 세 식구보다는 6개월 앞서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과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쉐어홈에서 지내면서 헝가리어 어학공부를 시작했고 틈날 때마다 부다페스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첫 외국생활에 적절한 집을 찾아다녔다. 부족한 헝가리어로 부동산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고, 그 사이 한인교회에도 등록하고 생활 모든 방면의 정보들을 모아나갔다. 집을 구경하러 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조정해서 한국과의 여덟 시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꼭 영상통화를 해주곤 했는데 영상통화 건너편에 보이는 방 두 칸짜리 집들은 영화 속 장면처럼 낯설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둘 다 직장생활을 접고 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은 늘 마음부터 작아지게 만들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 역시 그저 평범한 한국 엄마였기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문으로 유럽(비영어권)에서는 영어를 쓰는 국제학교를 보내는 게 한국아이들에게는 당연한 사치라고 알고 있던 터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이들을 그런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남편에게 이야기 했었다. 그 때 남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국제학교는 못 보내도 부다페스트에 ‘대치’, ‘잠실’초등학교 같은 학교에 우리 아이들 다니게 해줄게. 나만 믿어.” 서울에서 정릉동에 살고 있던 우리는 청담동, 대치동, 잠실동 이런 동네는 뉴스에서만 접하던 평범한 시민이었으므로 그 말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을 만큼 나에게 그 땅은 미지의 땅이었다. 남편은 스무 집 넘게 집을 보러 다니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본 제일 저렴한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고 전화했다. 방 하나가 두 개로 나눠져 있고, 거실하나에, 주방하나. 화장실 하나가 있던 50스퀘어정도의 40년 넘은 공동주택이었다. 그렇게 남편이 집을 계약하고 한 달 쯤 후 이민가방과 우체국박스, 캐리어 일곱 개의 조합에 공항바닥에서 쓰러져 잠들어버린 4살 딸과 잔뜩 긴장한 나머지 20시간을 뜬 눈으로 말없이 내손만 잡고 다니던 7살 아들을 동반한 반 실성상태의 내가 도착해서 확인한 노란 조명의 우리의 첫 월세 집은 그저 포근하고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남편 역시 6개월의 사전작업을 우리에게 확인 받은 시간이었으리라. 반갑고 감사한 마음과 부담의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한 남편이 준비한 집은 정말이지 부다페스트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동네에 제일 부자시민들이 다니는 헝가리공립학교와 도보 3분 거리였다. 남편의 말이 진짜였던 것이다. 3월에 도착한 상황이라 바로 그 학교를 갈 수는 없었지만 학교 옆 헝가리사립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튼튼한 두 다리와 편리한 부다페스트 대중교통으로 네 식구 모두 교육 기관에 다니는 것으로 헝가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낯설고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오랫동안 마음으로 기다렸던 부다페스트에서의 가족이 합체된 일상 자체로도 안심이 되었던 건지 매일 매일이 여행 같이 느껴지고 즐거웠다. 그러나 역시나 일상 속 어려움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둘째 아이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만큼 아팠고 나도 3차 신경통으로 진통제를 삼시 세끼 영양제처럼 먹으며 어학원을 다녀야 했다. 차도 없이 대중교통으로 빈 집을 채워야하니 지하철과 택시로 식탁부터 침대까지 이고 지고 나르며 채워나갔고 식수를 어찌 해야 할지 몰라 2리터 물 12병을 며칠에 한번 씩 들고 나르는 일상을 지냈다. 두 아이 모두 새로운 언어와 문화가 가득한 교육기관에 적응도 쉽지 않았고 그 때는 긴장감과 부담감 때문인지 그게 뭔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전문가에게 들은 바 큰 아이는 야경증(식은땀 흘리면서 밤마다 깨는 증상)으로 몇 개월을 고생했었고 둘째는 밤마다 눈물 없이 잠든 날은 없다시피 했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이제 한국에 돌아가자’ 며 여행용 짐 가방을 같이 활짝 열어놓고 어린것들과 부둥켜안고 통곡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해외생활 1년차 그것도 유학생의 부모이자 아내인 나는 그저 ‘우리 말고도 다들 그런 거 아닐까?’ 하는 그랬으면 하는 바람 섞인 ‘못 본 척’으로 1년을 보내며 버티는 중이었는데 결국 남편의 진로문제에까지 본격적으로 빨간불이 켜졌다. 가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과정 과정마다 브레이크가 걸리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영어권나라인 영국에서 비영어권인 헝가리로 진로를 변경하고 구두로나마 입학하고자 하는 대학에서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헝가리에 들어온 상태였는데 막상 입학을 하려고보니 헝가리 어학시험으로도 안되고 장학생과정으로도 안되고 결국 삼수 끝에 헝가리 고등학교 졸업시험(대입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된 그 지지난 과정은 우리 식구만 아는 구구절절 웃지 못 할 치열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온 후 3년은 흥미롭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쉽지 않게 헝가리어를 익히고 교육기관을 바꿔가며 적응하고 학업 하는 기간이었고 남편과 나에게는 처음 계획했던 딱 그 36개월(본인의 첫 휴직기간)이었는데 그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소소한 알바소득으로 짧은 여행이나 몇몇 취미활동,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외식 같은 선택적 여유를 부린 적도 있긴 했지만 늘 맘도 몸도 경제적으로도 여유는 없었다. 말 그대로 3년이라는 시간은 정기적인 수입이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시간이었음에도 예정된 운용자금이 거의 다 소진되는 것도 모르고 나름의 부모역할, 배우자의 역할, 그리고 유학생과 그의 반려자의 역할을 해나가면서 뒤돌아볼 새 없이 달렸던 것이다. 돌아보니 이때가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적응기간이 끝난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쯤부터는 상황이나 조건이 크게 좋아진 게 아닌데도 책의 1장을 마치고 2장이 시작된 것처럼 신기하게 지난 시간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앞날도 계획이라는 걸 해볼 수 있는 조금은 달라진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내부적인 마음의 변화마저 가지지 않았다면 결국 다시 눈물을 머금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나름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본 지난 3년, 둘째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을 때 차도 없고 기댈 다른 가족도 없는 우리를 위해 남은 아이를 돌봐주시기도 하고 입원 식사인 빵 한조각과 감자스프를 보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에게 밥을 싸서 병원에 갖다 주시고, 내가 신경통으로 고생할 때 감자탕을 끓여 솥 째 갖다 주시던 손길 등 작고 큰 도움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유학생으로 이민가방 몇 개로 헝가리에 온 가족이라고 베개며 그릇이며 작고 소중한 쇠 젓가락 까지 하나하나 모아 주시고 선물 주셨던 그 정성들이 우리의 고단한 3년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선물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우리 역시도 작은 선물들을 건넨 일들도 생각났다. 앞서 말한 ‘대치’초등학교 앞 그 작은 집에 이사 들어갈 때의 일이다.(*이 학교의 진짜 이름은 사실 ‘축복’초등학교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축복이 된 아이들 첫 학교의 이름.) 나는 한국의 이사 문화를 떠올려 같은 건물에 사는 다섯 집의 선물꾸러미를 만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작은 팩소주와 김, 그리고 인사동에서 사왔던 나무젓가락, 그리고 마이쮸를 담았던 것 같다. 집집마다 벨을 누르고 미리 연습한 헝가리말로 인사하며 선물을 전했다. 처음 본 헝가리 어르신들이 많이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사실 우리 말고 이웃집들은 서로 인사도 잘 나누지 않았었다는 말을 나중에서야 전해 듣고야 그 표정들이 이해되었다. 그렇게 선물로 첫인사를 나눴던 여든이 넘으신 옆집 할아버지는 이웃으로 살던 3년간 우리아이들이 모자를 안 쓰고 외출하면 큰 소리로 저지레 하실 만큼 아이들을 귀히 여겨주셨다. 그리고 나는 학기(9월 1일)가 시작하면 한국 추석을 핑계로 아이들 유치원과 학교에 또 명절 선물 꾸러미를 준비해서 매 해 보내곤 했다. 그때도 김, 인사동표 열쇠고리나 동대문표 아이들 장난감이나 문구, 양말, 덧신, 마이쮸, 쌀 과자 등 작은 아이템들을 지퍼 백에 넣어 보내고 아이들의 나라인 한국과 한국 명절을 소개하는 짧은 메시지를 담았다. 시기적으로도 9월말 10월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이 선물들은 아이들을 학교에서 새 학년에 자리 잡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코로나 때 추석 꾸러미에는 한국 KF마스크와 패션 마스크 줄을 넣었었는데 반응이 과히 뜨거워서 나중에 따로 마스크를 더 구할 수 있는지 묻는 메일을 여러 번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특별했던 점은 헝가리는 선생님이나 고마운 분께 선물을 맘껏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것인데 이 역시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헝가리문화상 이름날, 생일, 여성의 날 등등 마음을 부담 없이 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기에 여유 없는 형편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름날, 교육자의 날, 방학식날 두 손 무겁게 아이들 편에 선물을 전하며 아이들과 우리를 아껴주시고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분들에게 선물로 보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우리가 주는 선물도 그렇지만 그렇게 나를,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 존재로 선물 같은 인연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더 생겨났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원격으로 한국어교원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국어를 더 열심히 가르쳐 나갔다. 한국을 좋아하는 헝가리사람에게 선생님 이상으로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노력들은 시간과 함께 쌓여 나에게는 헝가리 동생, 헝가리 조카, 헝가리 할머니, 헝가리 할아버지, 헝가리 사촌 등이 생기는 가장 큰 선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관계의 열매들은 내가 그들에게 선물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어쩌면 그들은 이미 나에게 선물 같은 존재들로 다가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 느닷없이 결정하게 된 헝가리가 우리에게는 행운을 가득 담은 선물꾸러미가 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과의 인연들 뿐 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회들을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된 우리의 해외 거주생활 제 2막-위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나는 4년차부터를 2막으로 부른다.―에서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는데 하나씩 꼽아보자면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한국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운동과 각종 방과 후 활동을 경험 할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아주 가까이에서 저렴하게 승마, 테니스, 수구 등등을 다 체험할 수 있었고 여러 시도 끝에 현재 큰 아이는 정말 저렴한 가격(회당 5천원)으로 세계선수권 대회 수상경력이 있는 코치에게 펜싱훈련을 받고 있다. 지지난 달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선구권대회에서 한국국가대표선수들을 전담으로 돕는 도우미로 일하기도 했다. 아이에게는 경기장 뒤에서 훌륭한 선수들과 같이 운동에 대해서 얘기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 되었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이런 특별한 스포츠도 생활체육처럼 시작할 수 있었던 덕분에 훈련을 시작한지 15개월 차에는 국제대회까지 나가서 프랑스 주니어 선수와도 예선을 치르기도 했다. 둘째 딸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5년째 발레를 배우며 일 년에 한번 갈라 콘서트 무대에 오른다. 지난겨울에는 300명 관객이 앉을 수 있는 극장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콘서트에도 출연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생일파티도 해줄 수 있었는데 그 장소들을 열거하자면 승마장, 동굴, 박물관, 골프장, 사격장 그 어디든 가능했기에 고민 끝에 큰 아이에게 크게 열어준 첫 생일파티에서 아이는 학급친구 엄마들이 같이 준비해준 생일선물로 트럼펫을 받았다. 그 트럼펫으로 리스트음대 석사학생에게 6년 째 개인 레슨을 받으며 지금은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었다. 매주 공연에 서는 프로연주자가 버스를 타고 일주일에 한번 우리 집에 꼬박꼬박 찾아와 방문과외를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학교 역사나 예술시간에 배운 것을 궁금해 하면 장대하고 거창한 계획 없이도 즉흥적으로 두 시간에서 여덟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실물로 그 땅을 밟아보고(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체코, 크로아티아, 폴란드 등) 현장을 느끼고 실물을 볼 수 있는 중부유럽 중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 가장 큰 혜택이자 내가 생각하는 그야 말로 가장 큰 선물이다. 헝가리의 국경이 일곱 개 국가와 접해있고 헝가리의 수도에서 옆 나라의 수도까지는 한국에서 서울-부산을 오가는 느낌 정도 인 경우도 여럿이다. 우스갯소리로 부다페스트-비엔나는 서울-대전에 비유되기도 한다. 유럽 내 저가 비행기는 입출국 수속마저 필요 없이 마치 에어버스처럼 이용할 수 있어서 프로모션으로 나오는 저렴한 표를 구입하고 48시간 즉석여행으로 다녀온 나라들은 이미 10개국이 넘는다(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 독일, 터키, 이집트 등). 이렇게 48시간을 특별하게 채운 즉흥 여행후기를 하나씩 적다보니 꽤 많은 구독자들도 생겼다. 그렇게 아이들은 이미 3대 박물관, 3대 미술관을 여러 차례 다녀왔고 지구라는 땅 어디든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 하기 보다는 궁금해 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다. 보고 싶은 그림을 보러 이탈리아에 가자고 말하는 아들, 듣고 싶은 뮤지컬 넘버를 들으러 이번 주말에는 런던에 가자고 하는 딸을 보고 있자면 바다를 건너거나 국적기를 타야만 경험할 수 있는 멀게만 느껴지던 다른 나라를 이렇게 가깝고 부담 없이 느낄 수 있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참 멋진 일이다 싶다. 

  나 역시 뜻밖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3년차 되던 해에 매년 외국학생들을 헝가리에 유치하여 학업하게 하는 장학생혜택을 신청할 기회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만 준비하면 되는 손쉬운 준비과정이었다. 6개월간 집중과정으로 헝가리어학원을 다닌 경력이 있었던 나는 초급반이 아니라 중급반에 들어가서 1년 동안 월마다 약 30만 원가량의 용돈도 받으며 하루에 5~6시간 수준 높은 헝가리어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장학생과정을 다니면서 새로운 젊은 친구들도 만나고 기대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화경험을 즐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다시 만난 공부의 즐거움과 만족감이 컸다. 그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헝가리 인문분야에서 나름 명문 있는 ELTE 대학교 음악 문화과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내 나이 서른아홉의 일이다. 

  우리 식구끼리 서로 비교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지만 헝가리에서 가장 특별한 기회를 누렸던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남편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남편은 삼수를 하며 헝가리 대학을 준비한 덕분에 제법 활용도 높은 헝가리어를 잘 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 더 이상 헝가리에서 체류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기로에서 자기 사업을 결심하는데 그 언어능력은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헝가리어를 배우는 한국 사람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헝가리 렌터카업체와 계약을 하고 꼼꼼히 서비스를 함께 맞춰가야 하는 자동차 렌트 중개업이었는데 헝가리어를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다.  

 사실 3년이 막 지났을 무렵 적응을 마친 것 과 동시에 몇 가지 어려운 일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친정아빠와의 이별이었다. 한국에서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던 친정아빠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전화를 받은 새벽, 짐을 싸서 한국으로 날아가 막내를 기다려주신 아빠의 임종을 지키고 곧 이어 떠나신 아빠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시고 모든 걸 포기하실 것 같은 엄마를 모시고 헝가리로 돌아왔었다. 죽음과 이별,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그 어느 때보다 사무치게 느끼고 배워가는 시간이었고 진정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공감의 힘을 알 수 있었던 그 시간을 지나며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자리에서 내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은 일들이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비가 많이 내린 5월 ,부다페스트 두나 강에서 허블레아니 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그 침몰된 배는 그 다음날 남편이 타도록 스케줄 되어있던 배였고 그 배에 있던 가이드는 남편을 가이드시장에 합류시켜주고 알바를 할 수 있게 도왔던 제일 가까운 팀 동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좋은 이모, 언니였는데 그녀를 두나 강에서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남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낮없이 실종자 수색과 유가족을 돕는 일을 위해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현장을 지켰다. 죽음 앞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깨달음에 관통되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을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모두에게 정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우리는 아시안을 혐오하는 시선에서 출발했다. 공부를 하러 갈 때 버스만 타도  헝가리 사람들이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겨 앉았고 교실에 친했던 젊은 친구들도 내가 기침을 하면 눈을 흘겼다. 그럼에도 나의 아이들은 어김없이 시작되는 하루를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온라인에서건 학생의 모습으로 살아내야 했고 우리 역시 그랬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고 제일 의젓하게 헝가리 생활을 해내던 첫째는 어느 날 진심어린 눈물로 ‘이방인으로서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고 호소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이민국 딱딱한 의자에서 앉아 기다리다가 저녁 일곱 시에 문 닫고 나오는 연중행사, 할아버지 할머니가 구워주는 빵과 음식을 먹었다고 자랑하는 반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포근하고 따뜻해야 하는 명절을 적적하게 보내야 했던 일 등등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들까지 나열하며 한국에서 살자고 마룻바닥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 처음의 아득한 유치원에서부터의 경험들까지 하나하나 읊으며 서러워하는 아이를 안고 같이 울다가 결국 나는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코로나 시국에도 한국으로 날아갔다. 소독약과 소독티슈와 마스크로 무장한 그 비행과 격리기간까지 이어진 그 귀국길의 긴장감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아이가 괜찮다 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그 여름을 한국에서 보내고 가족, 친척들과 오랜 친구들도 만나게 해주고 그리움을 다 채운 다음 결국 우린 돌아왔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3-4년차 복잡하게 시작된 우리의 해외 살이 2막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지인이 정의 해주셨는데 그것은 ‘교민’으로서의 삶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언제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학생가족, 마치 장기체류자의 신분이었다면 이제 우리가족은 이 땅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교민가족’이 되었다고 말해 주셨는데 몇 몇 어려운 일들을 겪고 난 후, 이제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이 땅에서 내가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이라는 게 묘하게 납득이 된 시점이었다. 

  교민으로서 라면 우리는 또 한 번 좀 달라져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달라져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의 사업은 제법 자리를 잡아 헝가리에 있는 한인 대표 렌터카 업체가 되었고 헝가리 직원들과 다른 나라 직원 및 한국직원들을 선발하며 직원 여덟 명의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책임져야할 직원과 그 가족들이 생겼다는 말이고 우리는 더 묵직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이들도 헝가리(공립) 학교에서 적응하고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는 몇 안 되는 사례로 언급되었다. 그렇게 두 발을 이 땅에 단단히 붙이고 몸을 세워가는 단계가 된 것 같아 보였다. 나 역시 우리에게 역할이 주어졌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과 일원으로 살아야 한다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고 이걸 조금 더 공식적인 형태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일과 연결하여 내가 느낀 참 좋은 헝가리를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나라고 이방 땅에서 어렵고 서러운 일 없었겠냐 만은 그 일들을 토닥토닥 위로하고 덮어줄만한 따뜻하고 친절한 헝가리가 늘 공존했으므로 나는 버틸 수 있었고 그 모습의 헝가리를 잘 알릴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그 만큼 큰 도움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의 경험과 시도들, 그리고 좌절과 실패, 어려움들, 그리고 때때로 보상받았던 성공은 고스란히 정보로 남았고 그걸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다. 먼저 그와 관련한 작은 시도로 정보를 모아 정보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정보지에 헝가리에서의 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생활정보, 기관정보, 상식 등을 정확하게 담기위해 그 어느 때보다 헝가리어도 더 열심히 공부했고 한국어로 정식출판까지 연결하느라 이런저런 만남을 추진하고 수도 없이 문을 두드리는 작업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인쇄소도 찾아가보고 4면짜리 신문 1000부 인쇄에 대한 회의를 했고 저작권에 대한 공부도 해야 했으며 헝가리의 성공한 잡지 사장님을 만나보기도 했다. 초판을 들고 몇 몇 한국 식당에 갔을 때는 내가 마치 외판원이 된 느낌을 받기도 했고, 이유 없이 ‘이런 건 안 될 거예요’ 라는 부정적인 예견도 마주해야 했지만 나는 복잡한 생각을 다 버리고 처음 생각대로 2021년 4월에 첫 정보지 ‘요나뽀뜨 코리아’ 1호를 발행했고 한인 슈퍼 등 몇 군데에 동의하에 비치할 수 있었다. 인터넷 시대에 종이 신문만으로는 많은 이들에게 정보를 공유 하는데 는 한계를 느껴 홈페이지 공부도 시작했지만 무리가 된다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네*버 카페를 개설하고 정보지를 올리고 관련된 정보를 좀 더 상세히 공유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코로나시절이라 한인들끼리도 교류가 어렵고 각종 백신접종에 대한 정보가 간절하던 시절 ,헝가리의 코로나 상황을 하루도 빠짐없이 업로드 하고 관련 정보를 한국어로 제공하면서 헝가리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고 2021년 4월에 시작한 헝가리 한인 커뮤니티 카페는 현재 3300명가량의 회원을 보유한 헝가리 내 온라인상 최대 한인커뮤니티가 되었다. 처음부터 공공재로 생각한 정보커뮤니티였기에 회원이 2000명이 넘었을 때 스텝을 공개 모집하고 모든 권한을 위임했고 여전히 자체적으로 이 온라인 정보카페는 잘 운영되고 있다. 이렇게 커뮤니티를 운영하다보니 한인들의 필요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함께 배우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교육공유 공간(교실)도 구성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어느새 두 해를 넘겼다. 고민 없고 조금 급한 성격덕분인건지 마음을 먹은 지 2주일 만에 작은 아파트를 임대계약하고 교실로 꾸미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던 게 2022년 1월 1일이었다. 이렇게 꾸며진 교육공간이자 센터에서는 지난 24개월간 헝가리어, 영어, 헤어, 그림, 꽃꽂이, 옷 만들기, 헝가리 요리, 페인팅, 독서 모임 등이 이뤄졌고 올해 2월에는 확장 이전하여 8개의 정규강좌와 3개의 동호회 및 각종 모임들로 주말까지 빈 시간 없이 오가는 사람들로 채워지며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또 한국 분들 중에도 헝가리어와 헝가리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서 강좌 중에 헝가리와 관련된 특별강좌(문화, 요리 등)들을 진행하기도 하고 헝가리에 진출해있는 기업들에 출장을 나가 헝가리직원들에게는 한국어를 교육하고 한국직원들에게는 헝가리 기초수업을 진행하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남편과 내가 애초에 헝가리에 오게 되었던 첫 마음을 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장애인복지 사업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매해 연말에는 헝가리 장애인 기관에 생활용품을 기부하는 활동을 개인과 카페멤버들과 하고 있고 헝가리에 주재로 나오신 한국 가정들 중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소개 및 개인수업도 이 교육센터를 통해 소소하게나마 진행하고 있다. 

 사실 그 사이 헝가리에 한인의 규모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놀랍게도 1000명에서 열배가 넘는 15000명 이상으로 늘었고 내 작은 생각으로 시작된 이러한 온/오프라인 공간을 이용하는 한인들은 눈에 띄게 많이 늘었다. 수적 성장보다 더 의미 있었던 건 내가 시작하고 힘을 쏟은 일들이 헝가리에 이주하게 된, 일하러 오게 된, 공부하러 온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대체될 수 없는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을 때인데 그때 내가 느낀 보람은 또 아무도 모를 나만의 것이기에 그럴 때는 아이들 앞에서도 어깨를 으쓱대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헝가리를 선물처럼 소개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어쩌면 ‘선물’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이쯤에서 이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도 한데 이미 순풍이 불고 있다고 느낀 나는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 한인들에게 선물을 했다면 이제 다시 나에게 선물 같은 나라가 되었던 헝가리에게도 선물을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일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 캠프’를 진행해보는 것이었다. 영웅광장에서 수백 명의 헝가리사람들이 모여서 K-pop 음악에 맞추어 한국노래를 흥얼거리며 단체 랜덤댄스를 추는 모습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우리가족이 시내를 걷고 있으면 “한국사람 입니까?” 라고 말을 걸면서 한국을 좋아하는 자신을 소개하는 현지인이나 외국인들도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고 딸아이가 이어폰으로 한국노래를 듣고 있는 걸 눈치 챈 옆자리 소녀가 딸애의 전화번호를 요청한 에피소드도 다 같은 맥락인데 이렇게 전 세계적인 열풍인 K-pop, K-컬쳐의 힘을 곳곳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던 차 헝가리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캠프를 계획하고 작년 여름 1회를 성사시켰다. 9명의 헝가리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했던 문화캠프를 통해서 또 새로운 방향성을 찾은 듯 했다. 한국 음식 만들기, 서예활동, 한국공예품 만들기, K 메이크업 배우기, K pop 댄스 배우기 등의 수업으로 구성했고 무엇보다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서 가르치는 나에게도 또 다시 좋은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고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피드백으로 보아 상호 매우 만족스러웠던 결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올해도 2회 한국여름 캠프(7월)를 개최하고자 지난달에 광고를 냈는데 성황리에 마감되고 성인들 대상 캠프도 열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성인대상 1회 한국캠프도 6월에 말에 열린다. 올해는 한국어 수업에 좀 더 심혈을 기울여보려고 교재도 준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작년 5월에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서 주최한 ‘K커뮤니티 결성 지원’ 공모전에 한국-헝가리 합창단 결성을 지원해 당첨되어서 5월부터 한국-헝가리 합창단도 운영하고 있다. 공모전신청서를 쓰고 당첨되어 예산을 받고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오디션을 개최했는데 마흔 명이 넘는 헝가리 사람들이 오디션에 참가해주었고 서른다섯 명의 단원으로 첫 연습을 시작해 현재는 일 년이 넘게 격 주로 모여 한국노래를 부르고 한국인 튜터들과 함께 노래하며 소그룹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 이 백 명이 넘는 관객을 모시고 성대하게 창단콘서트도 열었고 올해 초에는 KOFICE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우수 커뮤니티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제 한 돌을 맞이한 합창단에서 나는 선곡과 편곡 ,무대구성 ,합창 지휘 역할만 맡고 자체적인 운영을 지원하고 싶어서 연합회 형태로 발전시키고 헝가리 단원들로 운영팀을 구성해서 앞으로 사업을 진행할 있도록 준비를 마쳤고 연합회로서 노래모아 합창단은 이번 주 주말에 헝가리 ‘합창단의 밤 축제’에 초대되어 콘서트를 하고 다음 주 주말에는 헝가리 장애인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공연 및 한인회 출범식 축하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이쯤 되니 이제 내가 또 무슨 일을 꾸밀까 나도 내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결국 나는 이런 한국과 헝가리의 교집합을 찾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가는 일에 전문적으로 가속도를 붙일 수 있도록 관련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 연말에 한국 모 대학에 사이버대학원에 응시했다가 연구계획서가 부실해서 불합격하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멈출 내가 아니므로 오히려 시선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4년 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헝가리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과 헝가리의 언어와 문화교류에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나름대로 쉬지 않고 이어온 헝가리어 공부학력과 각종 활동을 알려드렸더니 석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을 것 같다고 현재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상태이다. 이 여름을 지내고 난 9월부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는 내 모습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내가 느낀 순풍은 내가 방향을 잡으면 언제 혼자였냐는 듯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동행과 응원, 그리고 뜨거운 반응이었다.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도 서로를 향해 서로의 나라를 향해 서로의 문화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진심들이 나를 이렇게 움직이게 했다. 요새는 한인들과 러닝 클럽을 만들어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국회의사당이 훤히 보이는 부다페스트 강변을 달리는 한인 러닝크루들, 상상만으로도 큰 활력이자 이어가고 싶은 기쁜 일이 또 추가된 것이다. 이렇듯 한국과 헝가리의 교집합은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키고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선물같이 느껴지게 한다.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나의 작은 시도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붙들고 다시 눈여겨보고 함께 해줄 이 곳 헝가리사람들에게 내가 ‘선물’같은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는 ‘내’가 그들에게 ‘선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또 내가 7년 전 그러했듯 아득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외국생활에서 각자의 고군분투 중인 한인들에게도 더더욱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마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더 잘 돌아보고 처음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무척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 멈추고 싶을 때나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구상하는 시작점에서 부담으로 마음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낄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타국살이 하는 거 신명나고 재미있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보는 건 제법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예상 밖의 희생과 고생에도 불구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그런 삶을. 이 땅, 헝가리에서 살아내야 할 남편과 나의 아이들에게도 감사와 진심어린 응원을 보낸다. 

  나아가서는 지구 반대편의 비슷한 크기의 작은 두 나라인 한국 그리고 헝가리가 서로에게 선물 같은 나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선물이 되어 서로 고마워하고 기뻐하며 더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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