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괜찮아
“저 요즘 완전 한가해요, 도움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
요즘 매우 바빠서 잠도 못잔다는 선배한테 내가 한 말이다.
“그럼 언제 시간 되? 우리 사무실 한번 와”
“목요일엔 고정적으로 가는 학교가 하나 있고, 프로젝트 하나 하는데 회의가 한주에 한번정도 있는데 조정 가능해요. 토요일에 가끔 공연하고...”
“뭐야, 일 없다며?”
“예전에 비하면 없지요”
왜 나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못할까. 올 초에 일 가뭄에 시달려서 깊은 우울감에 빠진 상태로 상담을 받을 당시, “아드레날린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항상 바빠야 한다는 심리 상태. 무언가를 하고 있고, 바쁘게 다녀야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 그래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무서워하는 지금의 상태를 말한다. 나는 아드레날린 과다 상태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뭔가를 할 때 절대 대충 하는 법이 없다보니 너무 여러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하면서도 모두 1순위로 해내려고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했다. 어느 순간, 동아리 활동이던, 취미 활동이던, 친구간의 단순한 모임이던 내가 하게 되면 100% 완성을 해야만 하는 임무가 되어버렸다. '재미가 있어서' 혹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사전에 결석은 없기 때문에' 출석하였다. 그러다가 그렇게 달리면서 살 필요가 없다는 순간에서야, 난 이제서야 다시 원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즐기면서 했던가. 그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 사고를 예언하는 경미한 사고가 몇십번 일어난다고 한다. 나에겐 작년의 교통사고가 그랬다. 수십번의 아찔했던 찰나들, 나는 그걸 ‘쾌감’ ‘스릴’이라며, 내가 꽤 과속운전을 잘 한다며(?) 무모하게 넘겼고, 마침내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할만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10분, 20분을 아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했던 당시의 나는 교통사고로 약 4개월간 일한 만큼의 돈을 피해자에게 지불하게 되었고, 차라리 4개월간 일을 안 하고 논 것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몸도 상하고,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노란 신호등만 보면 다리가 떨리는 트라우마도 생겼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교통사고를 내는 꿈을 꾸며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죄책감은 시시때때로 나를 극한 수치심과 우울감 속에 잠식시키곤 한다.
약간의 텐션조차 비워본 적이 없었던 삶이었다. 올라가야할 문턱, 목표가 있어야만 하루 하루가 생기있는 나날로 인식 되었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다가, 결국엔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버렸다. 그날 사고 이후로, 더 이상 억지로 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야지, 대충 한 푼 더 벌기 위해 의미 없이 했던 일들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반 백수가 되어있었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아드레날린 증후군을 맞닥뜨렸다.
인생에 아플 일 없고, 다칠 일 없고 하루하루가 평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아드레날린 증후군이 꺾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아팠고 힘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이 생긴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더 늦기 전에 아드레날린 증후군을 인식하고 잠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더 많은 부상을 입었을 것 같다.
내가 아드레날린 증후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이래로, 더 이상은 나 못지 않게 아드레날린 과다 상태의 사람들을 칭찬하기보다 걱정하게 되었다. 예전엔 "열정이 많으시네요"라며 칭찬을 해드렸는데, 더 이상은 칭찬이 나오지 않는다. 얼마나 더 달리다가 넘어지게 될까, 좀 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저러다 넘어질 때 참 아플텐데. 걱정과 연민, 안타까운 시선이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또 생각한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기질이었고, 열정이었다. 내 지난 열정을 후회하지는 말자. 다만 앞으로는 더 건강하게 일하고 살 수 있도록 내 몸과 마음을 조절하자. 그들도 그런 시기가 찾아오겠지. 아니면 안 찾아올 수도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다만 넘어졌을 때 잠시 누워있을 땅이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넘어진 김에 하염없이 울다가 일어서도, 괜찮다.
그리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앞으로는 나의 에너지를 꼭 조절하도록 하자 :) 올해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