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 빛 할미 꽃

나의 정원에 피어 있는 할미 꽃

by 박찬현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천차만별이지만 크게 나누어서

대단히 잘 살았다와 참 모질게도 살았다 이다.

여기에 못 살았다는 개입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그래도 저마다 사느라 노력은 했을 테니 말이다.




글을 쓰려고 생각했다면 아무래도 주인공은 잘 살았노라고 하는 내용을 다루고 싶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1993년)에 취재한 연로하시고 그저 시장 좌판에서 소소한 물건을 파시던 할머니가 늘 나의 생각 한편에 자리 잡고 살고 있다.

당시 그분 (故 김천덕 옹)의 연세가 (77세)이셨으니, 현재의 햇수를 합하면 올해가 100세가 되는 셈이다.



자주 찬거리를 사러 가던 시장 입구에서 키가 나지막하신 할머니가 정감이 가기에 껍질을 깐 콩이나 다듬어진 산물들 그리고 좌판 품목에서 빠지질 않는 찐 옥수수이다.

유년기에나 먹었을 법한 왕사탕, 너무나 사탕이 커서 어떤 방법으로 먹어야 할지 몰랐던 그 왕사탕을 종종 손에 꼭 쥐어 주시곤 했다.



이른 시간 시장엘 나가서 미리 준비해 간 신문지를 보도 위에 깔고 앉아서

할머니의 콩깍지를 까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우선 많이 반가워 해 주시니 고마웠다.

백내장이 있어서 시야도 흐린데 새벽시장에서 하루치 파실 물품을 가져 오셨기는 하나 피곤해 보이셨다. 게다가 옥수수 껍질도 벗겨야 하고 하니 선선한 오전 나절에 일거리를 마치려고 하셨던 참에 일에는 잼뱅이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를 털면 왠지 구수한 옛 이야기들이 강중강중 뛰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 손이 닿기 전에 잔손질의 길을 터 가니, 할머니는 기분이 좋으신지 허허거리며 연신 웃고 계셨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부터 힘에 부치는 일을 하시니 많이 힘드시겠다는 말에

“집에 있으면 없는 병도 생겨서 자꾸만 아파,”

그도 그럴 것이 젊어서 6,25전란에 남편을 잃으시고 홀로 자녀분들을 내로라하는 대학 까지 모두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때야 좌판이 곧 생명줄이니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자녀분들이 이미 모두 성인으로 저마다 세상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당신도 병저 누울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굳은 의지이셨다.



좌판을 죄다 팔아야 기십 만원이나 될까 싶어 그저 농으로

“이거 팔아서 어디에 쓰셔요?”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어디에 쓰긴, 불쌍하고 돈이 없어 공부 못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줘야지!”

“매일 비닐장판 아래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가난한 신학생들 도와야지”

당시 가톨릭 신학생들 7명 가운데 서너 명이 무척 가난했었다.

그들의 가족들은 달동네 단칸방을 면치 못했고 영양실조로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힘든 생활을 연명했었다.

“자제분들도 아세요?”

“어유, 알면 안 되지, 큰일 나! 나 장사하는 것도 못 마땅한데”

“아, 시방 색시니까 얘기 하는 거여, 절대 비밀이여, 비밀!”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붙여 가면서 물이 끓는 솥에 껍질 벗긴 옥수수를 집어 놓고

돌아서며,

“이래도 예전에는 내가린 목숨도 많아,”

“......,”

시종 의아해 하자 할머니는 빛바랜 사연들을 뒤적여 내시기 시작했다.



내용인 즉은 한국 전란으로 동족상잔의해라고 할까,

이쪽이 아니면 저쪽, 반공사상이 어느 때 보다 투철했던 시절이기는 하나

좌우를 분간하는 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억울한 목숨도 부지기수였을 그 당시,

‘종로경찰서’하면 즉결 심판도 많이 행해졌다고 들었다.

그런 혼란의 전국시절 인연이 닿은 목숨을 여럿 살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큰일을 도울 수 있었는지 질문에

“돈이 최고야, 그러니까 300을 쓸 일에 500을 쓰면 살려 주는 거지!”

물론 그 죄수가 소위 ‘빨갱이’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종로경찰서에서 판결이 나면 사형장 이슬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암암리에 출소된 이들은 어찌 되었는지에 관하여 할머니는

“첨에는 머리카락을 뽑아서 신을 삼아 줘도 보은을 다 갚질 못 할 것이라더니,

여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죽었는가봐,”

할머니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시민들의 공원으로 개장 했던 첫 회에 관내 학생들의 재능행사가 있었고 나는 미술 심사를 하기위해 참관하였을 적에, 그때 형무소 직원이 아직 개장하지 않은 곳 까지 형무소를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형무소 본관은 낡은 세월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사형장은 공원 개장 전까지 사형을 집행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 사형 집행 장 입구 미루나무 한 그로 서있었는데 밑 둥이 이상하게도 굵은 갈퀴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형수들은 그곳에 다다르면 그 나무 밑 둥을 잡고 몸부림을 친다고 했다. 그리고 사형이 많이 집행되는 날은 그 나무의 이파리가 누렇게 변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한 사형장 내부에서는 너무나 역한 냄새가 고스란히 휘돌아서 도저히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 미루나무를 보며 나무도 죽음 앞에선 몸살 앓는데, 그 가슴 저리는 생사 앞에서 그야말로 생의 갈피를 쥐어 줬는데 은공을 외면했다는 그 양심들을 왠지 한참 생각하게 했다.

기실 미루나무만도 못한 존재이기는 하나 함부로 판단은 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가끔 진홍빛 색을 품은 하얀 융을 덮고 고개 숙인 할미꽃을 보면,

늘 분기충천하신 그 할머니가 생각나고 그립다.

지면상 좋은 일을 하신 일들을 일일이 펼쳐 놓을 수는 없지만

평안하신 세상에서 기쁜 나날을 보내시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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