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셋째, 무아, 즉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점입니다.
이 말은 사실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라는 것이 나의 경험과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나’, ‘내 몸으로서의 나’는 계속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책 ‘내면소통’의 저자이자 연세대학교 교수인 김주환 교수는 “‘진정한 나’란, ‘지금 여기서 특정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일화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를 지켜보고 있는 ‘배경자아’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는 일종의 스토리이자 기억일 뿐이고, 그 스토리와 기억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는 ‘배경자아’로서 고요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몸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 내 재산, 내 학위, 내 집, 차, 직위를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고 나서 우리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다른 생을 영원히 반복하며 살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지금 생이 끝나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나라고 믿고 있는 ‘내 몸’도, ‘나를 설명하는 조건이나 관념들’도 나라는 존재를 속 시원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고정된 어떤 실체가 있길 바라지만 정말 고정된 어떤 실체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상하죠.
그럼 지금 키보드에 이 글을 치고 있다고 인지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나'는 알아차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비록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명상적인 마음, 메타인지적 마음으로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와... 나 오늘 진짜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이런 나를 김 과장님은 알아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고 있고, 그 행동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그 존재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하나의 스토리 기억으로 만드는 과정을 하게끔 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그 어떤 에너지가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이 몸을 빌려 껍데기와 관념을 가지고 경험하며, 내 관념을 형성하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에너지’이자 ‘관찰자’입니다.
지금까지 ‘나 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해 보았습니다.
부분적으로 과학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철학적이고 모호한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정답은 영원히 내놓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눈동자가 눈을 볼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과,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만든 스토리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에 '나'라는 것이 사실은 '관찰자'라는 것을 추측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