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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Mar 21. 2017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밥값을 해

넉살 - 밥값 (Feat. Koonta)

"이제는 좀 전역하자!"

친한 동생과 종종 군대 이야기로 화제가 엮일 때 치는 장난이다. '전역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군대에 묶여 사냐'는 자조 섞인 농담이다.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는 군대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상식으로 여겨진다. 공통의 대화 주제가 되기 힘들다는 점, 한편으로는 2년 간의 알량한 깨달음이 미경험자들에 대한 꼰대질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끼리 갖는 술자리 역시 군대 얘기는 적당한 안주거리 이상은 되지 못한다. 재미는 있으나 결국 자괴감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인 듯 하다. 과거를 열렬하게 추억할 수록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듯한 그런 열패감 말이다.

그럼에도 군대 얘기를 멈추지 못한다. 군대에서 우리는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간혹 '차라리 군대 있을 때가 행복했어'라는 푸념을 늘어놓는 이유도, 자기가 '군대 있을 때 얼마나 굉장했는지'를 과장해가면서 까지 지겹게 반복하는 이유도, 비록 입대가 강제에 의한 것이었을지언정 스무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 사회인으로서 존재를 인정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혹자는 '인생에 성취라고는 고작 남들 다 다녀오는 군대 다녀온 것 말고는 겪어본게 없는 놈들이나 군대 얘기한다'고 비아냥 대기도 한다. 그러나 군대 경험을 쿨하게 비아냥 거리는 사람이든, 군대 얘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그 인정에 대한 기억은 첫경험 만큼이나 강렬하기에 잊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군대에서 받았던 그 '인정'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우리가 수행했던 '노동'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존재의 인정이 노동을 통해야만 한다면 인생은 정말 괴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일단 전체의 일부로서 기능하기 위해 인격의 일부분만을 쓰며 살아간다든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간을 빼앗기는 불합리를 견디며 노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직업적 소명감에 기대어 단순히 노동이 신성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와 노동은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진영이 경제활동을 하는 모두를 불쾌하게 규정한다. 무엇보다도 생활을 위한 노동보다 생활 너머에 있는 어떤 가치를 위한 노동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현실만 보더라도 노동은 노동 자체로서 의미를 갖기 보다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봐도 무방할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힘>의 저자 강상중은 다소 뻔해보이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를 빌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 후>는 20세기 초 서구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타락하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껴 속물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사와 거리를 두면서도 아버지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결국 다이스케가 금지된 사랑에 발을 들이면서 아버지로부터 파문 당하고 그는 그가 혐오하던 친구 히라오카처럼 속물 세계에서 일자리를 찾아 다니게 된다.


즉,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인간은 결국 환상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로 읽었다. 인간은 최소한 계속해서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줘야 한다. 부조리함에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적어도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한다. 단지 다이스케는 부모에게 기생하며 살아왔기에 그런 강제로부터 면제된 특수한 상황을 누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돈만 충분하면 일을 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아쉽게도 부유함이 인간 존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못한다.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존재의 불안을 넘어 생존의 위협까지 느낀다. 마치 왕따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그런 고통 말이다. 자진퇴사 압박에 저항하는 직원들에게 일을 주지 않은 채 벽만 보고 있도록 시킨 두산 그룹의 사례가 '인격 살인'이라고 비난 받은 것은 전혀 과하지 않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노동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고, 이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된 사람을 강상중은 '어른'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의 결함에 부당하게 기대고 있는 듯한 결론이지만 지금까지 역사는 이렇게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거기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습성이 DNA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마치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적 노동자라는 개념에 대해 타협을 전혀 하지 않은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제 내게 그런 언설은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한다는게 자존심 상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노동을 한다고 모두 인정욕구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아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단순한 한량들은 아니지만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애써 긍정하려는 것은 "내가 왜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어리광 섞인 개인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게 어른이니까', '좋은 것들을 살 수 있으니까'라는 유예된 답변을 넘어서는 것 뿐만 아니라, 훗날 내 자식의 입에서 튀어나올 질문을 미리 예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앞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이 질문에 살을 보태가야 하겠지만,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내 밥그릇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상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등 떠밀리듯 행하지 않기 위해 먼 길 돌아온 '밥값해'라는 가사 한 구절이 내게 새롭게 들리기를 소망한다.


비록 돈이 없이
하고픈 일만을 하더라도
돈 때문에 하고픈 일을 못하더라도
밥값 해 밥값 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해
밥값을 해

- 넉살, 밥값 (Feat. Koo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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