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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pr 17. 2017

'힙합'이면서 '페미니즘'일 수 있을까?

'여성혐오적인 힙합'과 '페미니즘' 사이 괴로운 이들에 대한 이슈

엘이에서 이런 글은 상당한 논란이되고 유저간에 다툼도 많은 주제인걸 알지만 혼자 생각해봐도 딱히 방법이 없어서 글써봅니다 
일단 저는 여잔데 저희 학교 애들이 거의 힙합을 싫어합니다.. 여성 비하가 많다고... 근데 그게 맞는 말이라서 딱히 뭐라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같은 여잔데 왜 그런 걸 좋아하고 즐기냐? 그러면서 성평등을 주장해? 이런 느낌이라 참 답답하더라고여 그렇다고 나는 그런 쪽은 안 듣고 얌전하고 감미로운 힙합만 들어 라고 거짓말도 하기 싫고 어쩌면 좋죠? 예전에 비해 그런 가사를 쓴 래퍼들이 반성도 하고 많이 좋아졌다라고 동기들에게 말하지만 여전히 가사는 비치비치빛ㅊㅊ.. 저도 성차별은 정말 싫어하고 안된다는 입장이라 동기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때 고민되더라그여.. 내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거 같아 혼란스럽기도 해요..ㅜㅜ; 안들으면 되는데 이 좋은 걸 어째 안들요 하
★ 출처 - 흑인음악 매거진 '힙합엘이' ( http://HiphopLE.com )


페미니즘 내에서는 노선에 따라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남자들을 연대의 대상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그만큼 당사자-비당사자의 문제는 첨예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영역에 속한다. 반면 당사자 끼리의 입장 차이는 어떠한가? 예컨대 "힙합은 여성혐오적인 장르이므로 듣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아닌데! 난 들을 건데!" 하면서도 같은 여성 동지로서 여성인권과 취향 사이에서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는 부류 말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 문제와 힙합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힙합 리스너들을 위한 몇 가지 정형화 된 탈출구가 준비 되어있긴 하다. 이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몇 개 가져와본다.


"굳이 남 눈치를 봐야 되나요? 듣고 싶으시면 그냥 들으세요"
"그냥 마음 편하게 김심야, 저스디스 들으세요. 친구들한테는 슬릭, 제리케이 추천해주시고"
"힙합이 폭력적이고 여성 비하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아닌 거도 엄청 많음."
"여자 입장에서 남자랩퍼가 빛치 남용 오용하는 거는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거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외힙에 많은 랲퍼들이 사용을 베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힙합 좋아한다고 여성비하를 좋아하거나 묵인하는게 아닌데 너무 단편적으로만 보면서 매도 하는것 같네~ 쇼펜하우어, 칸트의 글도 좋아하면 여혐인가"
"그런부분에서는 노답이긴하죠. 사실 개차반인 가사들도 많은데 힙합이라는 음악적 장르의 사운드가 좋아서 들을수도 있죠"
"가끔 보면 영화는 완전히 가짜고 배우들도 연기를 하는거니까 관대하게 받아들이면서 음악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네요. 솔직히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를 쓰는 래퍼들이 현실에서도 비치거리지는 않을텐데.. 그냥 음악이잖아요. 저스트뮤직 물론아냐 스윙스"
"딱히 님이 이중적이라는 생각은 안들어요 ㅋㅋ 님의 사상과 입장은 견지하면서, 단지 엔터테인먼트로 힙합을 즐기는 것이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비윤리적 가사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면서요)."
"저 역시 성평등을 중시하는 남성이고, 여성을 bitch 라 부르며 비하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이 거친 본토문화에서 최고의 여흥구는 역시 N-word, B-word 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단어를 뺀 힙합은 아직 상상하기 어렵네요(국내에선 후자만)."
"장르를 좋아하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하고 있고 비윤리적인 지점을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생각합니다"


1) 개인의 음악 취향을 견지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2) 개인적으로는 취향대로 음악을 소비하고, 대외적으로는 여성혐오 이슈에서 벗어난 힙합 음악을 전시해라.
3) 힙합 내부에서 여성혐오적 가사에 대한 자정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러한 면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라.
4) 현실과 음악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구분하며 수용할 수 있다면 윤리적으로 문제될 지점이 없다.
5) 여성혐오적 단어들이 온전히 여성혐오를 나타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위에 발달한,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장르적 클리셰들이 혼재하고 있다. 이를 제거한다면 힙합의 많은 부분이 손상될 것이다.

위의 댓글들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듯 하다. 지금부터 간략하게나마 하나씩 한계와 가능성을 검토해보자.

1. 개인의 음악 취향 주장
- 이러한 답변은 페미니즘의 사회운동적 성격과 원글 작성자가 처한 상황(친구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상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저변을 넓히려고 한다. 끊임 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문제를 제기하고, 견해가 다른 타인과 충돌한다. 이 상황에서 원글 작성자는 궁극적으로 친구들의 문제제기를 회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충돌은 서로의 견해를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빗대어 보기 위함이기에 대화를 피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2. 사적인 음악감상과 공적인 음악감상의 분리
- 1번처럼 아예 회피해버리는 것은 아니므로 충돌을 그나마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위선적인 방법인데다, 결국 그 한 지붕 두 살림을 본인이 일방적으로 감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문제의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힙합이라는 장르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의해 이러한 균열은 언젠가 수면 위로 부상할 수 밖에 없다.

3. 힙합 내부의 자정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필
1) 힙합 내 여성혐오 이슈에 대한 주요 답변 중 하나다. 루페 피아스코의 'Bitch Bad'의 가사 " Bitch bad, woman good, lady better"를 인용하거나, 한국에서는 제리케이나 슬릭이 페미니즘 이슈를 반영한 주제, 여성혐오적 워딩을 삭제한 가사를 반영하는 것을 예시로 든다. 그러면서 원래 장르라는 것은 가변적인 것이고 힙합 역시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힙합 내의 여성혐오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부류다. 간편하고 아름다운 결론이지만 개인적으로 현실의 문제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고 코멘트하고 싶다.

- 이렇게 접근해보자. 소수자 혐오를 성찰하자는 주장이 장르 안의 또 다른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하나의 서브장르적 특성으로서 규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다. '서브장르'라는 말은 전체가 되지 못했다는 뜻, 즉 넓게 봤을때는 "니가 설치면 힙합이 위험해져"라는 느낌으로 '여성혐오 문제와' 적당히 타협한 형태의 힙합의 일부 분야로 격리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돈, 여자, 술, 마약 같은 요소는 인간의 어떤 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요소들이고, 이 성향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꼭 힙합이 아니더라도 '더럽다'고 여겨지는 음악들은 존속할 것이다.

조금 덧붙여 보자면, '비치 배드' 같은 메시지를 말하는 랩들에 '컨셔스 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가정해보자. 실제로 이런 곡들은 '컨셔스' 하다. 그런데 컨셔스는 힙합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 서브 장르의 특징으로서 존재하며, 이러한 컨셔스함은 힙합의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즉, 컨셔스를 부정한 형태의 힙합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힙합이 여성혐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바뀌어야 한다!" 이 주장은 '컨셔스'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치고 만다. 여전히 여자 엉덩이에 얼굴 파묻고 떨피는 랩퍼들은 "그건 니네나 해"라고 말할 것이다. 힙합 내의 여성혐오라는 이슈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어떤 본질적 특질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주 중대하고 내적인 이슈를 차지하고 있는 문제인 반면, 과연 '일부'라고 규정되어버린 이 컨셔스한 랩들이 '전체'를 흔들고, 궁극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특질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그 부분에 대한 우려가 남는다. 게다가 메인스트림 힙합이 변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다. 힙합엘이 스탭 '칸초'의 페이스북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미국 래퍼들이, 과거에 논란을 일으켰던 행동이나 발언이나 가사에 대해서 사과를 하는 게 종종 있었는데.. 그 사과들은 그냥 그 당시의 사과들일 뿐입니다. "미국도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도 이래야 함" 하며 미국 래퍼들의 사과 사례를 가져오는 거 존나 의미 없어요. 그렇게 예로 든 래퍼들 중에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이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 힙합이 스스로 바뀌려고 부단히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보고 말하는 건지 1도 모르겠습니다. 서브 장르야 그럴 수 있겠지요. 메인스트림은 전혀 아닙니다. 제발 미국 예 좀 들고 오지 맙시다. 작년 최고 존엄곡 중 하나인 THat Part부터 지금 빌보드 핫 100 1위곡까지 전부 다 그냥 극도의 여혐으로 시작합니다. Eminem의 마지막 앨범처럼 여혐에 대한 자기 인사이트는 분명히 있지만 그게 다에요. Eminem은 결국 그 앨범에서 여자를 던져서 정액에 처박잖아요. 그 곡에 피처링한 현재 미국의 컨셔스 대장 Kendrick은 대놓고 bitch는 sucker for dick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깨어있다는 이상한 드립 좀 제발 그만.

p.s.) 저는 힙합 내의 여혐을 옹호할 생각이 1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힙합 접을 생각이 1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듣는 래퍼들 100 명 중에 100 명이 여혐 없이 16마디를 쓰는 걸 힘들어하는데 그렇다고 그 100명을 하루라도 안 듣는 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 들으면서 여혐 욕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위선이라서 그냥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여혐이 어쩌고 저쩌고 하자는 게 아니고 미국 힙합이라고 포장하고 그런 거 좀 하지 말자는 겁니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하는 게 팬이니까여 ☆

- 칸초 페이스북 中


- 장르가 언제고 불변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사실이다. 힙합은 어느 장르보다도 급격하게 자신의 모습을 재조직시켜왔다. 그러나 그 변천의 역사 못지 않게 현재의 힙합이 여성 혐오 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의 가능성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현재의 상황을 전제로 놓고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당위이고, 바램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변하면 좋겠지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힙합의 문제가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칫 이야기는 공허하게 흘러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 그리고 한편으로는 태도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듯 하다. 단적으로 통념적으로 저열한 수준의 여성비하 표현이 있다고 했을 때 그 텍스트 내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쓰였는지, 일반도덕에 비춰봤을 때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 등 그 표현의 가치를 저울에 올려놓고 평가하는게 최소한의 절차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힙합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주장에는 이런 절차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오라"는 주장이 자기모순에 처하게 된다. 반대로 "힙합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예단하지 말라"는 논리로 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페미니즘이 힙합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페미니스트들이 힙합을 공부해야 한다. 헤겔을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공격했던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철학적 베이스는바로 헤겔이다. 헤겔을 알아야 헤겔을 비판을 하든 말든 하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원글 작성자의 친구분들의 태도에는 자신이 비판하려는 대상에 대해 최소한 알아보고 까겠다는 존중의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데 뭐... 여기까지 요구하는건 무리라고, 심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3) 그리고 현실과 예술적 가상의 문제에 있어서, 예술적 텍스트가 사회적 구성물의 하나로서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관점의 주장들은 힙합이 여성혐오적 메시지를 확산시키고 재생산한다고 비난한다. 물론 충분히 일리있고 경험적 사실에 기반했다고 보여지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힙합이라는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 힙합의 구성원들이나 힙합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나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결국 똑같이 같은 사회의 영향력 아래 처해있다는 뜻이다. 한국힙합 내적 동인으로만 온전히 여성혐오적 메시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한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하에서는 힙합에 여성혐오 문제를 전부 뒤집어 씌우는 것 역시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주장은 수용자의 주체성은 무시하고 피동성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4) 자정작용과 결부된 마지막 논점을 다뤄보자. 나는 글의 서두에서 당사자-비당사자의 문제를 언급했고, 중반부에서 이해에 기반한 비판을 요청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모르는 힙합 애호가가 페미니즘을 훈계하는 글을 쓰는 경우나, 힙합에 대해서 모르는 페미니스트가 힙합을 훈계하는 글을 쓰는 경우의 난감함은 이 두 가지 문제와 모두 얽혀 있다. 그러면 이제 힙합을 좋아해온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을 공부해온 힙합퍼가 대답할 차례다. 근데 아직 전자의 케이스는 알지 못하므로 후자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성주의 힙합'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꿈꾸고 있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라면 제리케이, 슬릭 등이 대표적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함정에 빠져있다.여성주의를 힙합으로 직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나태한 태도 속에서 만들어진 곡들은 기본적으로 재미도 감동도 없다. 그저 '여성주의'가 '힙합곡'이 됐다는 소박한 기쁨이 이너서클 내에서 공유될 뿐이다.


못 만든 영화를 보면, 자신이 하려는 명확한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위해 영화를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술의 영역에서 메시지를 말하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지 그 메시지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이야기의 결론을 갖지 않고 이야기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밀어붙인다면, 그러니까 애초에 교훈을 이야기에 녹여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열린 태도로 풀어나가면 그 이야기 속에서 그 교훈이 스스로 살아남게 된다는 거겠죠.

- 이동진, 김중혁, 질문 하는 책들, 146~147p


무엇보다도 그들이 힙합의 어법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게 보이는데 이 경우 '힙합'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진다. 힙합팬들이 봤을때는 힙합의 어법은 거세한 채 외부인스러운 시각으로 'Fuck the police' 자세의 리스너와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뭔가 얘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략 차원의 문제 이전에 기본적으로 장르에 대한 이해 수준이 의심되는 지점이다.

미국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니키 미나즈는 'Bitch', 'Big ass' 등의 코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주체성을 얻으며 거꾸로 남성들을 향한 무기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경우 방향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노창이 <My New Instagram> EP에서 체계 자체를 공격한다는 차원에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본다(ex.  CHING CHANG CHONG, 위아더월드, 너, 좆간지, 털ㄴ업해야해). 물론 이 두 사례 역시도 체계를 부수려고 작정했다기 보다는 기존에 합의된 상징들에 대해 기시감을 부여하면서 재미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는 비판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힙합' '아티스트'라면 외부자적인 시선이 아니라 내부자적인 시선으로, 적어도 힙합 아티스트라면 외부에서 비난하는 3인칭 어법이 아닌 체계 내부에서 그 문법 자체를 내파하려는 창조적인 시도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자기 자신과의 물리적 단절은 손쉬운 과거청산 방법이긴 하지만 모순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인지부조화는 누구에게나 괴로운 문제다. 쉽게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4. 현실과 음악적 세계 사이의 거리두기를 통한 비판적 수용은 윤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 많은 예술 장르들이 비윤리적 소재와 부적절한 연출로 비판 받으면서도 장르 자체의 존립을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는 콘텐츠의 수용자가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작품을 현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힙합의 현실에 개입한다는 혐의는 마냥 부당한 것일까?

- 힙합과 여타 예술 장르를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이 있다면, 청자에게 적극적으로 가사와 MC 자신을 결부시켜 이해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이는 힙합이 다루는 소재들(일상적 상황, 자수성가에 대한 과시 등)이 많은 가사량을 통해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료한 메시지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향과 만나 MC와 청자의 동일시로 쉽게 옮아가도록 한다.

그러나 MC가 어떤 윤리적 경계선을 넘으려 할 때면 가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며 비난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다. 즉, 가사에 MC의 자아 그 자체를 재현해 놓았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저 하나의 캐릭터일 뿐이라며 아슬아슬하고 적극적인 줄타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이라서 닳고 닳은 예시는 역시 블랙넛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김태균(테이크원)이 힙합엘이와 진행했던 인터뷰의 한 대목("제가 예상했을 때는 많은 비난을 받을 줄 알았어요. 특히, “책상” 같은 트랙은 진짜 저의 바닥까지 표현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런 바닥까지 표현한 음악은 굉장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또 그 위험함이 제가 추구하는 예술 중 하나거든요.")도 주목해볼만 하다.

이것은 힙합의 내부논리인 'Real할 것', 즉 진정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MC는 청자에게 자신의 내면을 꾸밈 없이 전시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태도와 힙합으로 이뤄낸 성취들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보여주고 증명하라(Show & Prove)",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Real Recognize Real)"라는 어구 역시 이러한 맥락 아래서 존재한다. 진정성의 확보를 통해 리스너들로부터 진정성을 아직 인정받지 못한 여타 MC들과의 계급화("Real vs Fake" Rapper)가 일어난다.

문제는 이런 계급화를 거부하는 MC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Fake' 취급 받는 랩퍼들이 종종 전략적으로 '리얼함'을 차용하면서 "대체 '리얼'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리스너 입장에서는 "언제는 이 가사들이 진짜 리얼한 내 모습이랬다가, 언제는 이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그냥 이미지일 뿐이다" 라고 면피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마냥 힙합이 억울함을 호소하기에는 충분히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다.

5. 여성혐오적 가사 위에 불가피하게 달라붙은 장르적 클리셰들
- 이 경우는 분리하고 싶어도 분리할 수가 없다. 정교한 예시는 아니지만 예컨대 '돌'이라는 단어는 암석의 작은 조각을 지칭하는 말인 동시에 지능적으로 덜떨어진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지칭하는 비하적 표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이 두 기의는 '돌'이라는 기표와 결합되어 있어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조금 더 힙합과 결부시켜 직접적인 예시로 들어가보자면 'Bitxh'라는 단어를 피해갈 수 없다. 이 단어는 힙합 내에서 거의 만능에 가깝다. (1) 일반 여성을 속물적인 것으로 비하하기 위해, (2)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남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여자를 지칭해 비하하기 위해, (3) 남성스럽지 못한 남성을 "계집애 같은 놈"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기 위해, (4) 굳이 남성-여성의 대립항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성별 불문한 불특정 다수를 자신보다 낮춰 부르기 위해, (5) 그것도 아니면 그냥 "빋치"라는 발음의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청각적인 조미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등 무수한 활용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르적 클리셰라고는 하나 힙합의 대부분의 비하 표현은 분명히 여성을 경유하지 않고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구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제약을 통해 새로운 표현이 개발되고, 이런 우연에 기반한 언어의 문제(ex. 'Bitch'처럼 거친 소리를 가진 단어가 추임새처럼 쓰이는 것은 '여자'의 비하적 의미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의 지형은 새롭게 재편될 수 있다.

- 마무리
당위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당위를 먼저 설정해놓고 그 지향점으로 모두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기획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 당위는 그것을 주장하는 집단 내에서 합의된 규칙에 불과하다. 물론 인류적 관점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약속들이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조금만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제로 파고들어가면 그 절대성은 의외로 쉽게 부서지고 만다.

그리고 페미니즘이든 힙합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안경이고 틀이다. PC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한 가운데서 출발해야한다. 과거 운동권이 겪었던 지나친 교조주의, 이론을 배제한 실천, 자기모순 등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제리케이와 슬릭의 곡에서는 빈번하게 '가르침'과 날카롭지 못한 실천이 그물망에 걸려들어온다. 차라리 슬릭은 니키 미나즈만큼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여성 화자로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이라도 있다.

그렇다고 힙합과 페미니즘의 결합에 대해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노창과 니키 미나즈의 사례처럼 충분히 창조적인 대안이 존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지점은 도외시하는 한편 표면적인 부분에만 논쟁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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