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의 긴 침묵이었다. 2011년 SNS를 통해 ‘카이로의 봄’ 시위를 이끌었던 구글 직원 와엘 고님은 올해 초 TED를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첫 마디를 뗐다. “"사회를 해방시키고 싶은가?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 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그는 SNS는 시민들에게 독재정권에 맞설 힘을 쥐어주었지만, 머지않아 서로를 향한 분열의 장으로 변질되었노라고 고백했다.
SNS의 실패는 와엘 고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투명사회>에서 ‘좋아요(Like)’는 담론의 팽창을 가속시키지만 여기에 ‘No’라는 부정성이 배제되어있기에 치명적이라고 지적한다. 'No'의 역할은 대화를 중단시키고 서로 다른 성질의 의견을 섞는 데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에 ‘화나요’가 생겼을지언정 여전히 ‘싫어요’는 없다.
조너선 색스의 <차이와 존중>에서도 9.11 테러 이후 새로운 공론의 장을 모색하며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모두를 향해 이야기하는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 보다는 자기 집단만을 향하는 ‘내로우캐스팅(Narrowcasting)’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내로우캐스팅을 통해서는 공론의 장은 물론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논쟁하고 설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SNS 시대, 우리는 ‘No’ 없이 점점 더 내로우캐스팅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소통이란 갈등의 해결보다는 배제를 선호하며, 이는 SNS의 숨겨진 속성이다. 우리는 '팔로우' 기능을 통해 대화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소식만을 받아본다. 싫어하는 사람? 단지 팔로우를 끊는 것으로 더 이상 뉴스피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맥락 속에서 숙성된 단어 체계끼리는 온전한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세월호 유족'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시사in’의 빅데이터 분석 기사에 따르면 세월호 유족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 '이용', '선동' 등의 단어를 연상한다. 반대로 찬성하는 사람들은 '정부', '사과', '책임'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이들은 같은 기표를 사용하지만 다른 기의와 연결되며 각자의 논리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2016년 11월, 한국은 ‘여혐 가사’ 논란으로 광화문 집회에서의 공연이 취소된 DJ DOC 논란과 마주했다. 여성단체들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관점에서 ‘미스 박’이라는 표현 속 여성혐오를 지적하고 DJ DOC의 무대를 보이콧했다.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거냐”고 반발하고, 여성단체가 “민주주의는 절대 여성혐오와 동행할 수 없다”고 재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SNS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들의 언어투쟁에는 과연 출구가 있을까? 다른 생각은 시야 밖으로, 같은 생각은 증폭되는 배제의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언어로부터 고립되지 않을 수 있을까? SNS의 기술적 가능성만을 가지고 민주주의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환상에 가깝다. 그렇기에 사용자들은 SNS 안의 배제의 메커니즘을 인식하고,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진정한 소통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