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 원짜리 이어폰, 30만 원짜리 블루투스 스피커도 장만했건만 어째 영 음악 듣는 흥이 살지 않는다. CD와 라디오에서 MP3로, 다시 LTE 속도의 스트리밍 방식으로 점점 음악은 쉽고 빨라지고 있지만 오히려 듣는 재미는 사라지는 듯하다. 스마트폰과 마주선 내 엄지는 황망하게도 허공에 머물고 만다. 음악의 존재방식이 소유에서 소비로 옮아갔다고 느끼는 게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지 오래다. 네가, 내가 아니더라도 대신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 이것은 과잉공급의 시대의 한 단면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도 많은 ‘잉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은 물건뿐만이 아니다. 도시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게워내고, 우리의 이야기는 그러한 도시적 존재 양식 속에서 희석된다. 아파트 뒤에 또 다른 아파트가 지어진다. 이 좁은 땅에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주공아파트를 갖고 있는가. 그렇게 막연히만 생각하고 있던 얼마 전 어느 낯선 아파트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술에 취한 탓에 부득이하게 온수에서 인천까지 택시를 타게 됐다. 밤길을 한참을 달려 인천 구월동 언저리를 지날 때쯤이었다. 택시기사는 의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구월동은 오씨 집안 집성촌이었지.” 난생 처음 보는 그 주름진 입에서는 우리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의 이름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제야 엷은 가로등 불빛에 아저씨에서 할아버지 연배로 건너가고 있는 듯한 그 택시기사의 얼굴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돌림자로 따져보니 나는 그의 손자뻘이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껄떡이 아저씨’라고 하면 다 알아”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나는 쌀쌀한 새벽, 널찍한 송도신도시의 한 도로 위로 버려졌고, 이곳은 목적지일지언정 내 뿌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좁고 아무 것도 없지만 많은 것을 아는 곳’이 있다. 반면 ‘넓고 많은 것이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곳’이 있다. 나는 가끔 송도가 싫어 터널 건너 5분 거리의 청학동에 아무런 볼일 없이도 가 있다 오곤 한다. 겨우 그 5분의 시차가 내게는 절대적이다. 이곳에는 607호 아저씨가 주말 저녁 아이들을 모아놓고 바둑을 가르쳐주셨던 기억과, 508호에 살던 내 또래뻘 되는 두 형제와 함께 했던 놀이터와, 나와 초중고 시절 내내 친구들과 함께 했던 등하교길의 이야기들과, 학교를 마치고 103동 1층에 들어서면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서늘하고 퀴퀴한 습기의 냄새와, 여름만 되면 풀냄새 나는 바람에 산모기를 실어 날랐던 뒷산 청량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내가 시선을 돌리는 구석마다 문득문득 뛰쳐나온다.
역사적 사건이나 작품이 지닌 여러 겹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것을 ‘두껍게 읽기’라고 한다. 이러한 두껍게 읽기는 ‘로컬(Local)’의 특권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느 땅의 ‘로컬’인가. 드넓은 송도신도시의 왕복 10차선 대로를 고급 세단들이 질주한다. 이곳의 607호 아저씨는 바둑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 508호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이곳 아파트의 1층은 채광이 좋은 통유리를 사용하고 있는데다 쾌적하여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송도는 매립지인 탓에 산도 없다. 물론 고작 손바닥만한 청학동에 비하자면 송도의 거대함은 가히 압도적인데다 살기에 편리하다. 하지만 반죽이 밀대에 뭉개지듯이, 그 넓이를 못 이기고 얄팍해져버린 도시를 나는 스트리밍 음악을 듣듯이 ‘얇게 읽’을 수밖에 없다.
도시의 사람들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차이 속에서 의미를, 의미를 다시 두꺼운 이야기로 쌓는 법을 잊어버렸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첫 장면, 건축학개론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는 말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게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과잉의 시대, 과연 우리 ‘잉여’로 태어난 세대들에게 ‘우리 동네’라는 뿌리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가능할까. 이야기를 잊은 대신 그 자리를 소비로 대체한 도시의 삶으로도 우리는 충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슬프게도 나는 아직 이곳에서 돈을 쓰지 않고서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