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May 01. 2017

동백의 이름

E SENS - 손님 / 구름 - 마피아

E SENS - 손님
네 립스틱과 술 묻은 손. 약간의 피로, 배고픈 영혼.
허기는 언제나 느껴, 배가 안 불러. 충분하단 말은 즉 가만 있는것.


힘없이 명멸하는 형광등은 차라리 호흡곤란이나 발작에 가까워 보였다. 그 조명에 허락된 이름이 '사이키'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쉽게도 그 불안정을 대하는 관점은 결함에 근거하는 것이 마땅했다. 빛은 천천히 사그라 드는가 싶은 순간 번뜩이며 살아나고, 곧 다시 껌뻑이곤 했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며 날카로운 자극과 내 사이를 뭉근하게 뒤덮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비정상적인 것, 교체되어야 할 것, 힘이 다해가는 것, 그러므로 불쾌함을 주는 어떤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아슬하게 끼워 걸쳐놓았던 담배가 뜨거워졌다. 느리게 내뱉은 숨결에서 쏟아져 나오는 술과 담배냄새가 불쾌했다. 마지막 한 모금과 함께 불씨를, 언뜻 어젯밤 꿈 속에 나왔던 광경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어느 남자의 등을 감싸안은 어느 여자의 팔목과 키스마크, 매니큐어를 붉게 칠한 손톱이 그 등에 오른 두툼한 살집을 찢으며 파고드는 장면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검붉은 피가 흘렀다.

붉은 색. 난데 없이 동백을 떠올린다. 향도 모르면서.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새빨간 거짓말들. 3년 전 거닐었던, 어떤 시멘트 담장 사이로 구불구불한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의 길을 떠올렸다. 붉었다가, 희었다가, 다시 붉은 색 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때도 봄이었는데, 몇 송이 되지도 않는 것들이 바람 속에서 새빨간 것들만이 새빨갛게 새빨갛게 살점을 덜어내고 있었다. 오늘은 목련보다도 새하얀 것들만이 제 몸을 더럽히면서 처절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소복을 입은 빨간 마스크, 간호사복을 입은 조커. 그것들은 바닥을 뒹굴며 자신들의 이름을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내 이름은 붉은 동백, 꽃말은 기다림과 애타는 사랑입니다. 내 이름은 흰 동백, 꽃말은 비밀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름이란 모름지기 누군가가 입술과 혀를 놀려 다정하게 불러주어야 성립하는 계약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 얼음을 뚫고 녹여온 그들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건 흙먼지를 뒤집어 쓴 것들에게 배당될만큼 한가한, 그런 부드러운 살덩이는 없다는 사실. 결국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다.

남겨진 것들을 위해 남겨진 자리는 없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더라도 그 친절이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뒤바꿔놓지는 못한다. 손님이 주인에게서 손님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 고개를 쳐박고 두 손을 쉴새 없이 움직여 입 속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쑤셔넣더라도, 손님에게 허락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댓가를 지불하고 추방을 유예받을 뿐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공허를 가슴에 품고 손님이 드디어 문밖으로 나선다. 소복을 입은 조커의 미소 위로 포개지는 담배 연기, 불씨의 뜨거움, 그리고 형광등. 주인은 손님이 나가고 잠시 후 의자에 올라선다. 그는 충분히 식은 형광등을 떼어냈고 붙은 채 죽어있는 몇 마리의 오래된 하루살이들을 무심한 듯 툭툭 털어냈다. 살점도 없이 껍데기만 남은 그 흔적들은 바스락거리며 바닥을 나뒹굴다가, 나뒹굴었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젠 세상에 없는 그 거짓말들. 나는 왜 사랑해요.


구름 - 마피아
매거진의 이전글 얇은 도시, 두꺼운 동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