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May 01. 2017

외않되?

'4월 단편 상상극장-이랑의 놀이'를 보고

1. 홍대 상상마당에서 '4월 단편 상상극장-이랑의 놀이'라는걸 보고 왔다. 대강 뮤직비디오랑 작업기 같은 거 해놨겠거니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뮤직비디오는 맞고 작업기는 틀렸다. 나머지 절반은 단편영화였다. 총 러닝타임 62분은 단편영화 2편이 41분, 뮤직비디오 4편이 21분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이랑이 연출과 시나리오에 관여한 작품들이다.

방금 검색해보고 안 사실인데 이랑은 한예종 영상원 영화연출 학사다. 단편영화 두 편은 마지막 크레딧에서 볼 수 있듯이 한예종 중급-고급워크샵 작품이다. 수준은 물론 다르겠지만 우리 학과 수업으로 치면 '방송제작워크샵'이런거 쯤 되려나? 어쨌든 이랑 2집 앨범의 제목과 동명의 곡인 '신의 놀이'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몰라" 왜 영화 얘기가 나오나 했더니 이래서 그랬구나 생각했다. 내게 이런 친절하지 않은 영화나 뮤직비디오는 어렵다. "왜 이렇게 표현해야 했을까?", "이런 표현방식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내 생각은 딱 거기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해석에 약하다. 더군다나 많은 독립영화들이 표방하는 그 느낌적인 느낌들이 공유하는 코드는 내게 생경하다.

2.

이랑 - 프로펠러
이랑 - 신의 놀이

왜 파닥대는 걸까?


이랑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왜 입을 다문채 노래하고 연주하지 않고 앉아 연주할까?


이랑 - 나는 왜 알아요 / 웃어, 유머에

왜 분장을 하고서 밥을 먹을까?


3. 러닝타임은 한 시간. 가격은 8천원이다. 문득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보통 영화들 가격과 같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에이, 그게 같나. 규모의 경제라는게 있잖아. 그리곤 다시 문득 이 표의 가격에는 '음악가이자 영화감독 이랑에 대한 서포트'라는 의미가 담겨 있단 것을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랑을 서포트 하는가.

여러분, 음원 사이트에 가사를 등록하지 않은 것은 책으로 나온 앨범을 사라는 의도입니다. 음원 사이트에서 백날 들으셔도 저는 50원 법니다. 저도 돈이 없으면 작품은 못 만듭니다. p.s 음원사이트에 가사 귀로 듣고 올리신 것들 봤는데 많이 틀리셨어요


4.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 그렇다. "나는 자주적인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두 번씩 생각해보았다 / 하지만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먹고 마시는 것이나 / 잠을 자고 움직이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에서 그녀가 읊은 가사는 어느 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으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다. 무엇을 위한 도발인가.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 그래서 한대음 트로피를 50만원에 팔았다.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 그래서 음원사이트에는 가사를 제공하지 않고 앨범을 책으로 묶어 만 사천원의 가격에 냈다.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 그래서 자신이 한예종 영상원에 다닐 시절 수업시간에 만든 작품과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된 뮤직비디오를 묶어서 티켓당 팔천원의 가격에 상영했다.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 그러나 그래서 이 사람은 <신의 놀이> 앨범을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공간인 아메노히 커피점에 악기를 가져다 놓고, 영업이 끝난 새벽 시간에 녹음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형화된 레코딩 스투디오에서 녹음하지 않고, 편안하고 울림이 좋은 공간에서 녹음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고, 음악에도 공간의 특성이 묻어났다"라는 설명이 달려 있지만, 어쩐지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는 문장 앞에서 그 진정성이 어그러지는 기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건 부당한 편견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온당하지는 않다.

우리는 예술을 감상할 때 어느 정도 스스로가 보고자 하는 것을 그 작품에 투사한다. 포크는 배고픈 음악. 샌드라 하딩이 말했던 억압의 수준이 높은 사회적 상황에서 구성된 지식이 더욱 객관적일 수 있다는 '강한 객관성' 개념. 그래서 배고프면 진정성 있는 음악. 나는 당당하게 내게 돈을 맡아 놓은 양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태도 앞에서 한동안 벙쪄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내밀며 다소 고분고분한 어조로 "한 푼만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말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관객이 제 발로 일어서기 전까지 감히 배우가 연극을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예술이라는 형식을 공유할 때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이다.

5. '돈이 없으면 작품은 없다'는 그 말이, 어째서 도발적으로 들리는 걸까. 나의 굶주림을 미화하지 말라고, '빈곤이 유도하는 진정성'이라는 환상이 자신의 작품에 덧씌워지는 것이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쫓아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파티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예전에 종종 힙합 CD를 샀다. 아마 2007년부터 였을 것이다. 때때로 참고서를 판 돈으로 힙합플레이야에 입금하기도 했다. CD를 사고, 공연에 가는 것은 그 음악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서포트 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힙합은 배고팠으니까. 꼭 그래서 그런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래서 CD를 잘 사지 않는다. CD로만 발매한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더니 얼마 후 스트리밍으로 풀려버린 비프리의 <희망> 앨범에게도 어느 정도 혐의는 있다.

그녀는 그 배고팠던 랩퍼들보다 훨씬 도발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 없는 태도로 청자들에게 돈을 요구했다. 음원 사이트에 가사를 일부러 걸어놓지 않았으니 돈을 더 내지 않으면 가사를 볼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드세요 그럼 많이 벌듯", "대박이다 진짜 ㅋ ㅋㅋ 50원번대 ㅋㅋㅋㅋ어쩌라고 ㅋㅋㅋㅋㅋ" 같은 반응들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 나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며 노래한다. 자신의 입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길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입이 없어 침묵하는 비존재들을 존재로 바꾸는 것만이 목적일 뿐, 그래서 돈을 벌고 작품 활동을 할 뿐, 그래서 자신의 청자가 아닌 사람들의 태도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나무가 되어가듯이, 그냥 그래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6. <신의 놀이> 책을 사서, 각 트랙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에세이를 읽고 나면 그녀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신의 놀이>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앞에서, 고작 팔천원과 만사천원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래서 이러면 안된다는거야? 외않되? 모르겠다. 앞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읊어본다. 나는 이랑을 서포트하는가. 질문을 고쳐 다시 물어본다. 이랑은 내 서포트를 받으려 할까. 모르겠다. 돈을 내고도 뺏긴 기분이 드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처했다. 모르겠다. 그녀의 음악이 궁금하고,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라고 그렇게 찝찝한 결론을 냈다. 예술가는 속물적이면 안되는구나. 이랑이 끝끝내 미워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외않되? 불편함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정말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백의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