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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2. 2017

사랑의 발명가가 재발명한 사랑

나는 왜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빌어 흔히 표현하는 그 행위들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랑은 대체 어디에? 애석하게도 알랭 바디우가 <사랑 예찬>(읽어본 적 없다)에서 한 번,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랭보가 한 번, "사랑은 재발명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 생각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이 사람은 과거 "내 가사는 내가 사는 힘"이라는 라인을 배치기에게 뺏긴 전력이 있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어쨌든 그들 역시 흔히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개념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정말로 그렇다. 도처에 널린 연인들을 보며 나는 '대체 왜 저게 사랑일까' 하고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사랑을 재발명 운운 하고 있는걸까. 그저 단순히 사랑을 모르는 게 아닐까? (이미 잘 아네, 루저?) 이 많은 수다더미 속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는 했었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사랑으로부터 3년 반이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야 내 사랑의 가능성을 검토해보려 하는 나는 무엇을 밝혀내고 싶어진 걸까. 아직 이 글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 부끄러움이 아닐까.

일단 사랑의 실마리를 찾아서 잡동사니 처럼 어질러진 기억을 헤집어 본다. 술에 취한 내가 밤길을 터덜터덜 혹은 비척비척 걷는다. 집에 가고 있는 거겠지. 그 적막한 밤길을 지나는 건 언제나 버스마저 전부 끊긴 새벽의 초입 쯤이기에 기억할 수 있는 특징적인 풍경이라곤 끝없는 보도블럭과 아치형 통로, 규칙적인 적황청 신호 대신 노란불 하나 껌뻑껌뻑 놓아두고 잠을 청하러 간 신호등 뿐이다. 그리고 가로등 조명 아래로 줄 지은 빛나는 원뿔의 행진. 그 중간 어디 쯤에 샌드백이 하나 놓여있다.

그 샌드백은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모를 어느 학교의 운동장 담장 안쪽에 걸려있다. 그 학교의 학생들은 급우 대신 샌드백을 쥐어 패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아닌가, 샌드백을 가지고 급우를 패는 법을 연습 했을지도. 음, 아마도 오늘날의 사랑이란 딱 이 샌드백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든 콧바람 한번 흥 불고서 머리를 한 두바퀴 굴리고 나면 패고 다니기 좋은, 그냥 그런 것. "야, 니가 잘못했네~" 혹은 "어우 미친거 아니야?" 나는 샌드백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담장을 넘고, 달려들어 이단 옆차기와(태권도 3단이다) 주먹과 돌려차기를 몇 방 두들기고, 지쳤다. (씨발!)

그러나 샌드백을 두들기는 수많은 권투 선수들. 그들은 매일 같이 수 십분의 로드웍, 수 백개의 줄넘기, 수 천개의 잽과 스트레이트를 견딘다. 결전의 날, 헤드기어와 8 온스의 권투 글러브를 끼고 순간의 싸움 속에 결연히 온몸을 던지는 그들. 링을 내려오며 상대의 스포츠맨쉽에 경의를 표하기도, 더티한 플레이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그렇게 마무리 되는 그들의 한 바퀴. 음, 아마도 오늘날의 사랑이란 딱 이 권투 경기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내 눈엔 사실 그것은 정확하게는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차라리 사랑과 동명의 스포츠인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형식에 업혀서 함께 간다. 규칙에 의거해 주고 받기. 그러나 규칙에 의해 제어된 그 교환은 딱 알맞은 정도로만 불확실하다. 딱 사람 미치게 할 정도로만. 골다공증에 걸린 것 마냥 힘 없이 덜그럭 대는 인형뽑기 기계의 손아귀는 정확히 '사랑'이라는 스포츠에 대한 은유다. 그 결과물인 승패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산물 같은 것. 몇 천원을 버려가며 끝끝내 뽑아버린 인형처럼 말이다. 인형뽑기 기계의 인형은 'Prize Out'을 통과하는 순간 그 매력을 상실한다. 불확실성은 증발해 사라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 나는 만 오천원을 버리고 꼬부기 한 마리를 결국 못 뽑았고, 그 날 이후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사랑을 하려 했더니, 그러려면 '사랑'을 할 것을 강요당한다는 점이다. 강요라기 보다도 선택지가 없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한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다니, 도둑놈 심보라고. 이 게임에 발을 들이고, 연습해서, 끝내는 쟁취하라고. 물론 게임이라는게, 재능충도 있고, 노력충도 있다. 잘하는 사람과 하게 될 수도, 못하는 사람 끼리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란다. 근데 내가 그걸 모르겠냐 바보야. 그러니까 이 게임 자체가 재미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이 게임 내 취향에도 안 맞고 존나 좆망겜이라고. 배그 좀 하겠다는데 왜 자꾸 서든을 하라는거냐고.

우리는 '사랑'의 규칙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관습을 떼어내고 곧바로 사랑으로 직행해야 한다. 녹아서 달라붙어버린 사랑과 '사랑'도 멀리 찢어놓아야 한다. 단순히 네가 누구인지를 빠르고 간편하게 알고 싶다는 효율성의 틀에 맞춰 순순히 깎여 나가야 할까. 인고의 과정 속에서 네가 원했을 내가 떨어져 나갈테고, 우리는 이 사실을 충분히 안타까워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백지 위에서 새롭게 발명한 둘만의 규칙, 그 뽀얀 단어를 너에게만 주고 싶은 것이다. 사람 미치게 하는 소유욕에 대한 것이 아니고, 너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본질에 대한.. 하지만 어쩌면 그 뽀얀 단어는 갤러그 쯤의 철지난 노잼 게임으로 치부 당할 수도 있을까. 그래도 그저 너라서 너의 모든 것이 좋은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뜨겁고도, 뜨거운 사랑을.

그런데 나는 이걸 왜 썼을까. 싸이월드 게시판 어디쯤을 헤매고 있어야 할 그런 글이군. 다 쓰고 났더니 역시나 부끄러움 뿐이고,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예견했으므로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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