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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May 04. 2017

최장집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 교과서는 87년 6월 항쟁으로 완결된 민주화의 역사를 가르친다. 완결된 것은 정지하고 그것의 미래는 더이상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안녕한지를 자문한다. 우리는 왜 지금 민주주의의 안부를 다시 물어야 하는가. 새로운 물음으로 이 글을 열어보자. 우리 사회는, 우리의 일상은 얼마만큼의 민주주의를 성취했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다. 즉, 민주주의의 회복과 유지-발전은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다는 뜻이다.

요즘 내 머릿속을 사로잡는 몇 개의 생각 중 하나는, 과연 얼마만큼 정치에 참여해야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은 종교의 영역으로도 비슷하게 옮아갈 수 있다. 크리스찬이 천국에 가려면 얼마나 열심히 영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가?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냥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열심히 하라는 답변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 대답 앞에서 내 생각은 '그 정도면 정치인 아닌가' 하는 어딘가 나사 빠진 대답으로 이어지거나 직업적 삶의 무게로 인해 일상의 시민적 책무를 회피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로 미끄러진다. 이 책도 이러한 실천 상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고민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저자에 따르면 의외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실천의 문제 이전에 대의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정당 정치'와 '시민 사회'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존재한다. 정당은 민의를 대표하고 그 책임을 다하기 보다는 자율적인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일상적 채널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천의 공간이 없으므로 이는 시민의 정치 소외로 이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냉전 권위주의가 낳은 부산물이 우리 사회 곳곳의 작동원리로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건국 이전부터 현재까지 구체제의 작동원리가 형성되고 기능해온 국내의 역사와 해외의 역사를 동시에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군부 엘리트와 재벌 사이의 유착, 냉전체제 하에서 협소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념의 지평, 단발적일 수 밖에 없었던 (내가 이전에 '뛰어넘기'라고 정의했던 비일상적 정치참여라는 측면의) '운동'으로서의 한계,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 민주화의 보수적인 이행 과정, 민주화 이후 정부의 무능 같은 것들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초점을 맞춰야 할 지점은 바로 '현상의 인과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까 싶다. 지역 불균형 및 갈등 문제,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을 위한 개헌 문제,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학벌주의 등 정치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슈들은 과도하게 중앙집중화 된 권력 구조의 문제다. 과도하게 집중된 힘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면, 그 힘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 힘 자체를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물론 아냐 절대 반지). 사람들이 일관되게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구조의 문제고, 그것의 작동 과정 속 사회적 유인의 흐름을 마땅히 살펴야 한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없다면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는 자칫 수평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소모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중앙집중화 문제의 극복 방안으로 당연히 다원주의를 내세운다. 그리고 다원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당 정치의 정상화를 주장한다. 낮은 발전 상태의 정당 정치는 직업적 정치인으로 하여금 '갈등의 사유화'가 만연하도록 방치한다. 정치인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을 있는 그대로 대표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운신에 유리한 갈등의 결만을 선택적으로 대표한다. 그 과정에서 빈번히 외면 되어온 대표적인 계층이 바로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를 대표하는 당 이름으로 '노동당'을 사용하고자 하면 곧바로 북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제헌의회가 고민 끝에 포기하고 '국민'으로 대체한 '인민(人民, People)'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이념 스펙트럼을 얼마나 축소 시켰는지 드러내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주권을 위임한다. 정당은 그 지지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러한 사회적 요구를 대표한다. 이렇게 부각된 사회 각계 각층의 요구는 대의제의 정점인 의회에서 충돌하고 조정된다. 이러한 지지-책임의 연결고리가 정당 정치의 핵심이며, 이 경우 더 이상 정당은 시민들의 일상으로부터 괴리 되지 않는다.

지난 날의 민주화 운동은 변화를 이끌어 냈지만 제도화 되지 않아서, 일시적인 '운동'이라서 그 결실을 모두 정치 기득권의 헤게모니 싸움에 내준 채 불완전한 결말을 맞고 말았다. 민의를 제도화 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단발적인 분출과 그에 따른 과도한 기대, 그에 따른 과도한 실망, 그에 따른 정치혐오로 이어지는 불우한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정당 정치의 정상화라는 해결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수단과 참여의 공간이다. 이 두 가지 결핍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화의 완결은 여전히 요원한 문제로 남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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