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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Jan 31. 2017

'넌 뭐하고 살래?' 누군가 물어온다면

어린 왕자, 학문의 즐거움, 니체의 말, 연금술사, 피로사회

#1. 어린왕자니까 던지는 질문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일은 묻지도 않는다. 즉 이런 말은 묻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어떤 친구냐? 그 친구는 어떤 놀이를 가장 좋아하지? 나비채집을 하느냐?" 이와 같은 말은 묻지도 않고 다음과 같은 말만 묻는다.

"그 친구 몇살이지? 형제는 몇이냐? 체중은 얼마나 나가니? 그 친구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시니?" 어른들은 이런 숫자에서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 아는체 한다.

- 생텍쥐베리, 어린왕자


   우리는 사회적 인간이다. 외딴 섬에 갇혀 살지 않는 이상은 벗어날 수 없는 진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기준과 그에 의한 가치판단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런 속성들이 오히려 서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틀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방법은 꽤 유용해서, 그래서, 사람을 지위와 숫자로 규정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인간성이 이런 지표들로 파악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는 사고방식이 이 방식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릴 적,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매년 자신이 바라는 꿈과 부모님이 바라는 자식의 직업을 적어오게 했다. 나는 중학생때부터 일관되게 프로그래머를 적어냈고, 부모님은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같은 안정된 직업을 적어주셨다. 수 년간 이어져온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의견의 낙차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좁혀지지 않았다. 사실 내 꿈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거니와, 부모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가져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를 지원하면서 부모님과 어느정도 암묵적인 합의를 보게 됐다. 그러나 나와 부모님이 보여줬던 간극이 아직 유의미함에도, 나 또한 결국 어린왕자의 눈흘김에서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 스스로도 프로그래머는 흥미롭지만 판검사보다는 귀하지 못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당신의 '원트'는 무엇입니까?



'니즈'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외부 상황을 판단해서 나온 필요성 (...) '원트'는 자기 내부에서 나온 필요성이며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필요성 (...) 여러가지 정보로부터 필요를 도출해서 진로를 결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건 방법으로 장래를 결정한 사람은 결정한 것이 욕망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디에선가 좌절할 가능성이 있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학문의 즐거움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각자의 손금을 가지고 있다. 마치 서로 다른 손금과도 같이, 사람은 태어난 배경과 자라난 환경, 성장하는 동안 그가 겪어왔던 경험들만큼 다양한 종류와 특성을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누구든지 남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살려서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다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경제적으로 해방된 삶을 원한다. '삶의 자유' 혹은 '불필요한 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이름의 돈은 물론 그 가치만큼 그 수량이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 또한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보통 우리가 가졌을때 즐겁겠다 싶은 직업은 '사'자 붙은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 말은 전문 직업들이 흥미를 가지기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흥미의 분야가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내가 갖길 원하는 직업이 어느것이 됐든지 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면 내가 위에서 밝혔던 부모님과의 의견 차이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내면의 즐거움과 경제적 자유, 서로 상충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나의 흥미와 부합하는 직업이 경제적 유복함과 일으키는 불일치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우리가 '사'자가 들어간 직업을 사랑할 수 있게 사고구조를 바꿔야 할까? 그에 대해 종종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꿈을 쫓아 살다보니 돈이 저절로 따라왔다'. 하지만, 그런 말 만을 믿기엔 우리 주변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 서사화되었으며(Entnarrativisierung : 역자주, 근대에 이르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의미.)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 한병철, 피로사회


   길게 돌려 말했지만, 우리는 결국 '내 흥미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 욕망'과 '잘 살아야 한다는 욕망' 사이에서 긴 시간 동안 수 없이 갈등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곧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삶의 지표가 모호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상실한 채 사회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각자를 위한 '운명적인 서사'가 필요하며, 내면의 목소리에 한층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학문의 즐거움'의 한 지면을 할애해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의 필요성으로부터 도출된 운명(니즈)이 아닌,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당신만이 타고난 운명(원트)을 찾아나서라는 속삭임이다. 난 그가 '원트'라는 단어로 표현한 그것이 당신의 꿈을 향한 마르지 않는 정력의 샘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3. 인생을 위한 스토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을 향해 던지고, 성실하고 확고하게 대답하라.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였을때 자신의 본질이 뚜렷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생을 사랑하는 니체는 말한다. 자신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할 것을. 바로 그것이 당신의 본질과 삶의 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봤을 때 난 성경과 같은 종교적 서사가 제공하는 삶의 나침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종교는 살아감에 있어 방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삶이 제시하는 경험들에 일관성 있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서사로서 채택된 종교적 세계관은 그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관된 방향의 의미로 등장하며, 세계와 자아의 일치감을 느끼도록 도움으로써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발 더 나아가 보자면, 종교 또한 삶의 의미부여 측면에 있어서 단순히 유용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근본적인 삶의 배경으로 받아들여졌을때 선택으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중세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된 신실한 농부와 다를 바가 없다. 즉 종교가 됐든 스스로 찾아나선 나만의 서사가 됐든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연금술사'는 잃어버린 인생의 서사를 찾기 위한 도전의 여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미 그렇게 되도록 기록되어있다'는 뜻의 '마크툽'이라는 단어를 자칫 운명론적이거나, 어차피 그렇게 되기로 되어있다면 굳이 애쓸 필요 없다는 식의 비관론으로 오독하면 안된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자신의 서사를 찾기 위해 삶 전체를 건, 한 가지 목표에의 치열한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의 앞 길에는 거친 시련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보물을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록, 어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늙은 왕이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불렀던 것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의 끈기와 용기를 시험하는 시련 뿐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그는 서두를 수도, 초조해 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이 그의 앞길에 준비해 놓은 표지들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 파울로 코엘류, 연금술사


#4. 결론



   우리는 사회적 인간이기에, 사회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더 당신의 자아는 주관적이어야 하고 단단해야 한다. '객관적'인 기준은 당신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게 여겨지고, 그래서 당신이 익히도록 권장되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가르친다. 나는 대안 없는 회의주의자 마냥 무작정 덮어놓고 사회화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마치 학교에서 성실한 학생으로 생활하되,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로 살라는 말 만큼이나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공적인 삶'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 곧 그에 굴복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객관적'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인 스테레오 타입과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당신의 내면의 속삭임보다 우선으로 놓고 애써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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