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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Jan 30. 2017

레자 아슬란 - 젤롯(Zealot)

민족주의적이었던 초기 교회와 혁명가였던 역사적 예수를 재조명하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어려운 책도 아니고 스토리텔링 형식이라 읽는 재미도 있다. 그런데 묘하게 안 읽혔던 이유를 되짚어보자면 비기독교인이 무작정 접근하기에는 너무 많은 고유명사가 가장 큰 장벽이었던 것 같다. 생소한 지명이나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명이인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점만 제외하면 무신론자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종교 서적이다.


저자인 레자 아슬란은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슬람 종교에 대해 미적지근했던 가풍에 힘입어 아슬란의 어린 시절 종교는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였다. 복음주의적이었던 그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아슬란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불신자들과의 마찰이 거듭됐다. 마찰들을 계기로 그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공부가 계속 될 수록 아슬란은 자신이 믿어온 '예수 그리스도'와 '나사렛 예수' 사이의 괴리감이 커져 느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신앙이었던 이슬람을 자신의 신앙으로서 재고했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 이후 아슬란은 종교를 전공하여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를 20년간 연구해왔다. 즉, 이 책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혀야 한다.




총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그 중에 100페이지 가량이 주석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그만큼 방대한 양의 사전조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 신자들과의 논쟁이 격렬했을법한 주제다. 이 책에 딸린 과할 정도의 부가설명은 그 논쟁들의 흔적이자 자기방어를 위한 일종의 노이로제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그런 논쟁의 과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굳이 읽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예수의 삶이 놓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다뤘고, 2부는 예수의 공생애를 중심으로, 3부는 유대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던 예수 사상이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방대한 주석만큼이나 풍부하다. 더불어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논리적 연결고리를 촘촘히 유지하면서도 스토리텔링 자체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을 느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과도하게 섞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주요 목표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과 로마의 충돌 양상과 사회 내부의 계급구조를 역사적 사료들로 재구성해내고 그 맥락 속에서 예수를 재조명해보는 것이다.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했던 메시아 사상과 예수 전후로 난립했던 수 많은 메시아들, 로마 총독과 유대 제사장들의 공생관계, 예수를 영적인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해 초기 성경의 복음서(공관복음 :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 Q자료)에 취해져야했던 신학적 윤색들이 주로 다뤄진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초중고 시절을 거치며 도덕시간에 배웠던 예수는 그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가페 정신을 설파하고 다녔던, 마치 흥부처럼 '왼 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마저' 내줄 것 같은 이미지의 박애주의자였다. 하지만 몇몇 성경 구절에서 내가 직접 만난 예수는 조금 과장하면 폭력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과격한 모습을 보인다. 예수는 특히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비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모순점들이 껄끄러웠을테고, 이런 성향은 자연스레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무신론자들의 조롱섞인 댓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모순들을 초기 교회의 발생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한다.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은 구약에서 이어져온 예언을 실현하는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올 것이라 선포했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시기를 전후로 해서 이런 메시아 사상을 기초로 한 운동은 팔레스타인 지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도 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운동은 유대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혁명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비폭력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예수의 모습은 박애주의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내 생각 역시 그렇다. 하느님의 나라를 현실의 땅 위에 불러오기 위해 열성적으로(Zealot) 가르침을 설파하고 다녔던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정말 재미있는 책이니 꼭 한번 읽어보길.


P.S


1. 지금과는 다르게 그 당시 사람들의 역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상력에 기반한 창작이 가미되거나 하는 등의 윤색은 문제되지 않았다.


2. 이스라엘이 로마와의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초기 교회는 둘로 나눠져 있었다. 하나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야곱)의 유대 민족 종교였던 이스라엘 교회, 또 다른 교회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던 바울의 교회. 야고보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바울의 선교를 방해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에게 포교를 하면서 구약의 규율들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단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르쳤으며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대 민족주의적 색채를 상당히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야고보는 유대 율법을 중요시 했고, 그것이 믿음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써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예수의 혈육이었던 야고보의 이스라엘 교회가 정통, 바울의 교회가 이단으로 치부되었지만,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나서 바울의 교회는 다시 힘을 얻었고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바울의 교파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 현대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마련된다. 당연히 야고보의 비중은 줄어들고 바울의 영향력이 올라간다. 야고보의 줄어든 성경상의 비중을 채운 것은 베드로다.


3.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후대의 복음서로 갈 수록 요한의 비중은 작아지고 예수의 중요성은 크게 서술된다. 처음에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가 뒤로 갈 수록 예수가 자신보다 더 큰 존재이므로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4. 폰티우스 빌라투스(본디오 빌라도)는 성경에 예수를 죽이는 것을 주저하는 것으로 서술되어있으나, 이 로마 총독은 유대인들을 혐오하여 죽이기를 서슴치 않아했다. 즉, 로마 총독이 예수를 처형할 때 고뇌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예수의 죽음을 극적으로 끌고가기 위한 서술자의 문학적 장치. 이런 식의 윤색은 성경 내에서 일반적인 장치로서 등장한다.


5.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는 병자를 치료해주는 마술이 하나의 직업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술로 치료 받기 위해서는 상당히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반면 예수는 치유의 기적을 돈을 받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고 다녔다. 마술은 부정적인 뉘앙스, 기적은 긍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 어휘라는 차이가 있었으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받아들였다는게 재밌는 포인트.


6.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다. 성경에는 유대의 왕이라는 죄목이 조롱의 뜻으로 쓰였다고 서술되어있으나, 메시아 운동을 했던 혁명가 예수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죄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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