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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Jan 26. 2017

첫 사랑, 잊을 수 있나요

건축학개론 (Architecture 101, 2012)

나는 영화를 아무리 좋은 영화도 두 번 이상 안 보는 편이다. 근데 '건축학개론'을 세 번 봤다. 한 번은 집에서 이불 덮고 혼자, 한 번은 학교 동기랑 시험기간에 강의실에서, 그리고 이번에 오래간만에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또 봤다. 영화로써 좋은 영화와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다른가보다. 건축학개론은 그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본 적 있다면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공감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찌질함과 순수함 사이에서 널뛰고 있는 승민을 보고 있노라면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내 첫사랑과 내가 그 위에 오버랩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그 첫사랑이 끔찍할 정도로 어수룩한데서 오는 안타까움이 두 번째 이유고, 감정은 이입했지만 내 얼굴은 이제훈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괴리감이 세 번째 이유다. 길쭉한 애들을 순박하게 입혀놓은 그 장면들 위로 내 머릿속에서 혼자 아름답게 뜯어고쳐온 기억을 오버랩시켜 마냥 즐기고 있기에는 때가 탔나 보다. 그래도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GEUSS'는 몇 번을 봐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이 영화는 승민과 서연의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시간 축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가인의 입에 붙지 않은 욕설("아 씨발 다 개같애")이 종종 몰입을 방해하긴 하지만 두 축을 이끌고 가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조합은 꽤나 괜찮았던 것 같다. 각 커플 조합의 케미스트리와는 무관하게 대응되는 '과거-현재'의 싱크로율은 썩 와 닿진 않는다. 다만 그 괴리감만큼 승민과 서연이 '어른들의 사정'을 겪으며 때 타 온 시간을 느끼는 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라도 저렇게 웃을 수 밖에 없을거야

후반부에 서연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이 영화의 흐름이 뒤집힌다. 영화 초반부에서 건축학개론 교수는 이런 대사를 한다.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것이 건축학개론의 시작이다." 서연에 대한 승민의 마음을 묶어주고 있던 것은 '같은 동네'라는 핑계였다. 그러니까 '같은 동네'가 아니었으면 서연과 엮일 일도, 불러낼 이유도 없는, 말도 못 붙여봤을 승민의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


승민에게 서연이 정릉을 떠나 '왕서방파'로 편입된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금 간 마음에 재욱이 연타로 구멍을 낸다.' GEUSS' 사건에 이어 종강파티 날 재욱(유연석)이 술 취한 서연을 집에 데리고 들어간 사건은 차곡차곡 쌓여 승민이 서연을 떠나는 '이별택시'를 타게 한다. 사실 이 모든 사건들은 승민의 경험 부족에서 오는 뇌내망상에서 왔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이의 부채질을 통해 감독은 '남의 연애사는 참견하는 게 아니'라는 또 한 가지 진리를 깨우쳐준다.


승민과 서연의 사이가 갈라지고 모든 것은 정해진 듯이 자연스럽게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안타깝게 엇갈리는 인연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어른의 사정이 잔뜩 끼어있는 현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을 향한 미련뿐이다. 그 내적 갈등은 어른이 된 승민과 서연이 제주도 집에서 키스하며 극점을 찍는데, 이것 또한 역시 완전한 판타지다. 아니, 이걸 판타지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람의 연애관이 드러나겠구나 싶다.


이 영화를 5년 내에 한번 더 보지 않을까. 그때는 느끼는 게 또 다를 것 같다. 서른 즈음에, 서른 넘어서 내가 갖고 있는 인생의 결이 다를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인생 내내 달고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좀처럼 정이 붙지 않는 각지고 큼직한 건물과 도로 투성이인 송도 한가운데에서, 소년이었던 나와 함께한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점점 짙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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