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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pr 17. 2017

설익었지만 맛은 좋았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0. 공각기동대 볼까 하다가 시간 낭비에 돈 낭비일 것 같은 생각이 관뒀다. 그냥 원작을 한번 더 보련다. 최근에 보겠다고 찜해놓은 영화도 없는 마당에 영화는 봐야겠고, 그렇다면 정답은 '노미네이트' 된 영화다. 히든 피겨스는 2017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분에 후보로 올랐던 작품이다. 그러나 과연 평단 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지는 직접 봐야 아는 법이다.



가운뎃 분(캐서린 존슨 役) 최화정씨 닮으셨다...

1. 과연 기대에 부합했나? '절반은 아니고, 절반은 그렇다'고 평하고 싶다. 과거를 재현하고,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영화가 지켜야할 덕목들은 잘 지키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 내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느껴질 만한 장면은 내 눈엔 뚜렷하게 띄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첨예하던 1960년대의 NASA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단순히 계산보조로 일하는 머리 좋은 흑인 여성 셋이 있다. 이들은 마틴 루터 킹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인종차별 철폐 논의로 시끄럽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흑인여성'으로서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주체성의 영역을 회복하고, 조금씩 확장해 나간다. 그리고 끝내 승리한다. 이 영화 스토리의 전부다.


소재와 연출 또한 그렇다. 인간이 우주에 가는데 그 주체가 미국이다? 99.9% 확률로 '우주선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천재 공돌이'가 주인공이다. 다만 이번엔 그 주인공이 흑인여성이라는 참신함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높은 확률로 국뽕요소("Make America Great Again!")의 향이 강하게 진동한다. 인종차별적 사회 인식 때문에 흑인은 백인으로부터, 혹은 백인우월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구조로부터 삶의 가능성을 제약당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흑인 개개인의 노력과 동시에 인종차별보다는 '하나의 미국'이라는 구호 아래 힘을 합쳐 미국의 거대한 적 소련에게 성공적으로 맞선다. 결국 영화 말미에 흑인과 백인은 서로 화합의 무드를 취한다.

그러나 그 화합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백인(NASA, 주류 사회)이고, 흑인들은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구조를 노력으로 극복해나가야 하는 존재다. 이 말인즉슨, 백인과 흑인의 화합은 흑인들의 전격적인 사회 진출에 따른 불가피한 후퇴에 의해 강요된 것이지, 백인의 자성과 양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집단 사이에는 애초에 상식적으로 화합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할 수 없다. 일방적인 반성과 사죄가 이뤄져야 하는, 폭력으로 결부된 관계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는 이런 위선에 대해 침묵하는 대신, "NASA의 모든 인간들은 같은 색 오줌을 싼다!"라는 감동적인 대사로 포장한다(그렇다고 이 대사를 뱉는 앨 해리슨의 진정성까지 의심하는건 아니다). 마치 흑인들의 점잖은 요구에 다소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백인들이 평화적으로 호응했다는 듯 말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NASA는 미 대륙 내 최고의 화이트 칼라 엘리트들이 우글대는 곳이다. 이 사실 때문에 <히든 피겨스>는 자본 계급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흑인 내에서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가 나뉘기 때문이다. 또한 NASA 내에서 도로시 본이 보여준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인종차별의 벽 조차도 저지될 수 없을 정도로(아니면 인종차별조차 뛰어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위력에 의해) 강력한 '순수한 재능'으로서만 존재하고 기능할 뿐이다. 백인 엘리트는 흑인 엘리트의 재능을 사용한다. 먼 옛날 그들의 조상이 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를 수입해 노동력을 착취했듯이.

이런 모순의 골이 거칠게 솟아있음에도 비교적 매끄럽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냉전의 논리가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억압받는 흑인계층에게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봉사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거대한 적인 '소련'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갈등의 봉합을 강요하고 이 모순된 명령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언제나 그렇듯 외집단과의 갈등은 내집단 구성원의 갈등을 잠재적으로 중단시키고 그 열기를 '적'으로 규정된 그들에게 발산한다. 누구를 위해서 '로켓'을 '올리나'? 아무도 그게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2. 자, 지금껏 신나게 깠으니 이쯤에서 비판적인 태도는 한 템포 접어두고 뒤로 물러서보자. 이제 '애초에 인종차별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 이 영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포인트를 맞춰볼 차례다. <히든 피겨스>는 그 당시 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들을 암시하기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연출에 있어 나이브한 여러가지 지점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그래도 꽤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히 인종 간 갈등이나, 남녀 갈등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흑인', '여성')은 영화 첫 장면부터 당연하게도 백인 경관 앞에서 비굴에 가까운 저자세를 보이며 언행에 주의한다. '흑인'이기에 '백인' 앞에서 주눅들고, 사회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던 '여자'이기에 권위를 가진 '남자' 경관으로부터 경멸을 당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스스로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최첨단 기관 'NASA'의 일원임을 강조하며 말을 돌려야 했다. 백인 경관은 흔쾌히 NASA로 출근하는 그녀들의 차량을 에스코트 해준다. 앞서 언급했듯 냉전 이데올로기는 성-인종차별마저 삼켜버리는 강력한 기제였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같은 흑인인 짐 존슨('흑인', '여성')으로부터 '여자'도 'NASA'에서 뽑아주느냐는 말을 듣는다. 곧바로 정정하긴 하지만 오히려 짐 존슨의 당황하는 모습이 당시의 성차별적 태도가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정확히 표상하고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섬세한 연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도로시 본('흑인', '여성')과 비비안 미첼('백인', '여성')의 관계를 통해 '여성-여성' 간 인종차별의 발생 역시도 조명하고 있다. 인종이 성별에 우선한다. 아직 이들 사이에 여성해방을 위한 연대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냉전 > 인종 > 성별"이라는 담론 간의 서열이 드러난다.

어쨌든 영화 후반부로 다가갈 수록 흑인 여성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상당히 상쇄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기술'을 '백인우월주의'와 동치로 등장시킨다. 이 연결고리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단지 백인들 스스로 규정했을 따름이다. 도로시 본은 당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메인프레임 컴퓨터 IBM의 등장이 단순 계산업무를 수행하는 전산원들의 대량해고로 이어질 것을 예상했다. 전산원으로 근무하던 흑인 여성들은 그녀의 제안에 따라 IBM에 사용된 언어인 포트란을 공부한다. 그 결과 IBM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백인 프로그래머들은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백인들을 제치고 로켓의 궤도계산을 담당하게 된 캐서린 존슨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녀는 극의 말미에서 NASA와 미국 전체를 로켓의 발사 취소라는 결정적인 위기로부터 구출해낸다.

'과학기술'은 더이상 '백인 남성'(도로시 본과 갈등을 빚었던 백인 여성 중간 관리자 비비안 미첼의 업무에는 전문성이 요구되지 않았다)의 전유물이 아니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이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그것은 단지 교육 수준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다.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차단했던 제도에 의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오만이 객관성과 합리성을 중시해온 서구 과학사회의 역사와 맞물리며 거대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이는 보부아르의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여성이 이전까지 '과학자'가 아닌 '치마'로서 존재했던 근거는 사회적 관습이었다. 그러나 그 관습이란 NASA 총괄 관리자인 알 해리슨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의 팻말을 빠루로 부숴 떼어내듯이 그저 '모두가 이제부터 그러지 않기로 하면' 바로 붕괴하는, 연약하고 자의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았다. <히든 피겨스>는 이러한 '절대성으로 위장된 자의성'을 폭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이 영화는 유인로켓 발사의 성공과 함께 1960년대 극렬했던 냉전 체제의 경쟁에서 미국이 끝내 소련을 꺾고 최종 승리자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메리 잭슨이 이후 인종에 무관하게 여성 요원들을 가르치는 'NASA 여성 훈련교관'으로 임명됐다는 정보를 자막으로 전달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냉전 > 인종 > 성별"의 담론 간 위계구조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성차별' 뿐이며, 앞서 철폐된 냉전과 인종의 문제처럼 성별의 문제 역시 똑같이 사라질 운명이라는, 다소 뻔하지만 중요한 메시지로 드러난다.

'과학기술'이라는 시스템은 지금껏 '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차별을 합리화 하는 기제로 작용해왔다. 이는 억압받던 이들의 폭로를 통해 드러났으며, 아직 남아있는 성차별과 편견 역시 같은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히든 피겨스>는 세 명의 흑인여성 주인공은 이러한 여성해방운동에 있어 새로운 롤모델로 인용되고 제시되기를 바라고 있다. 차별이 사라진 새로운 시대는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계몽시키는 노력에 의해서 열릴 것이라고 외치는 듯 하다. 도로시 본이 동료 전산원들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며 그러했듯 말이다. 정말 그렇게 될까?

<히든 피겨스>의 존재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이다. 이 영화는 여성운동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무르익었기에 기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구매층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는 개봉될 수 없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역사 속 '숨겨진 사람들(Hidden Figures)'의 존재를 대중문화 전면으로 끌어내기 위한 시도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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