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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08. 2017

'덩케르크'와 1, 2, 3

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 (Dunkirk, 2017)

1. 여기 인류뽕 곱빼기요~

영국군 복장 너무 멋짐...

뻬북에서 누군가 그랬지. "군함도는 국뽕, 덩케르크는 인류뽕"이라고. 중간쯤 보고 깨달았다. 언제부터 왕십리에 이렇게 거대한 인류뽕 플랜테이션 농장이 있었담. 인류뽕? 그까짓 뽕 낭낭히 맞아주마. 통통배 할아부지가 항구를 떠나던 그 순간에 이미 나는 EU와 영국간의 솅겐조약이 철회되지 않기를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한 사람의 밀입국자가 되어있었다. 아아, 시야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아이맥스급 인류뽕이란. 헬조센의 한 가운데서 국뽕을 외치다. 여기까지가 영화 감상을 마친 직후의 내 첫 느낌이다. 용아맥이면 어떻고, 왕아맥이면 어떻냐. <덩케르크>가 중요하다.


하지만 집에 오는 길에 알콜로 인류뽕을 씻어냈으니 다시 생각해본다. 덩케르크 구출 작전은 '영국판 흥남철수'에 가깝다. 고립된 40만명의 병력. 죽이자니 너무 많고, 살리자니 또 너무 많다. 독일군에게 포위된 프랑스-영국 연합군. 처칠 수상은 해군력을 일부 동원해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 병사 중 3만명에 대한 구출 작전을 지시한다. 40만 중 3만? 그나마 동원된 영국의 구축함들은 독일군의 폭격기에 의해 좌초당하고 만다. 그러나 영국이 모든 수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나머지 병력의 운명은 영국 정부에 의해 징발된 민간 어선에 달려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조국'을 위해, '조국의 미래를' 위해, '조국이 낳은 병사들'을 위해 유니언잭을 펄럭이며 수많은 어선들이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을 태우고 영국으로 무사히 귀환한다. 덩케르크 해안선 너머 눈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고국, 그 가깝고도 먼 도버 해협을 건넌 병력이 33만이다. 3만 아니고 33만이다. 처칠의 말처럼 "오늘의 후퇴는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전과다. 이것이 덩케르크의 메인 스토리가 맞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메인 메시지는 아니다.



2. 한 가지 암시, 두 가지 절제

일단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딱 한 장면씩만 등장한다. 그리고 '한 가지'는 그저 간접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절제된 '두 가지'는 바로 전쟁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피'와 '눈물', 암시된 나머지 '한 가지'는 '묘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피와 눈물과 묘지를 배제하고 덩케르크 작전의 위대함을 논하려 한다. 그러나 차와 포를 모두 떼고서 어떻게? 우리는 보통 영화 내에서 감독의 위치를 전지전능한 인물로 간주한다. 감독은 관객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힐 수도 있고, 얼굴에 펀치를 한 대 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란은 러닝타임 106분 동안 침묵을 지킨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공연을 연상시킬 정도로 말이다. 그저 건반을 닫고 침묵을 지킨 채 가만히 앉아 전장의 광경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블랙 호크 다운>을 떠올려보자. 감독은 고립된 특수부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특수부대원들을 총알 소나기 속으로 가차없이 떠밀어버린다. 몇몇은 압박 붕대 너머로 뜨거운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다 결국 분대원들 품에서 유언과 함께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들의 장렬한 희생은 남은 이들의 생존의지로 승화되기에 결코 무의미 하지 않다. 생환자들은 눈물과 함께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따라서 그곳에는 피와, 눈물과, 묘지가 있다. 이 세 가지 요소야말로 관객이 스크린 너머의 전장으로 입장할 수 있는, 전쟁영화의 전형적인 출입문의 문법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오히려 '피, 눈물, 묘지'에 대해 침묵한다. 그러나 이 '침묵'에서 놀란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침묵이라고? 그는 모든 씬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되어 꽉 찬 시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에게는 아이맥스 카메라마저 '차악'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하나의 씬은 하나의 눈이고, 전장은 아득한 수의 조각으로 나뉜 모자이크다. 그리고 그 모자이크의 실체란 깊은 밤 전쟁의 악몽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어느 늙은 군인이 흘린 식은땀이다. 역설적이게도 진정 우리를 전장으로 데려가는 것은 그 식은 땀의 축축함이다. 전쟁의 상흔들은 '국가유공자'라는 문구가 새겨진 허름한 모자를 쓰고 우리와 함께 매일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전쟁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감히 실제 전쟁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그 위대한 참상을 하나의 타임라인에 올려놓고 무책임하게 '피, 눈물, 묘지'라는 스펙타클과 감동의 조합으로 버무리고 뒤섞을 수는 없는 것이다. 놀란은 전쟁영화의 클리셰를 비틀어야 했다. 낭자한 혈흔 대신 생존에 대한 몸부림으로 이 영화 전체의 죽음을 대신해야 했다. 제독은 한 번의 글썽임으로 이 영화 전체의 눈물을 대신해야 했다. 그리하여 코끼리 다리를 짚고 있는 각자의 진실을 한데 모아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했다. 한 시간의 하늘과, 일주일의 땅과, 하루의 바다에서의 시선들이 각각 하늘과, 땅과, 바다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을 교차시킴으로써,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공군은 한게 뭐가 있는데?"라는 비난을 반복 배치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한다.



3. 그리고 세 가지 테마

'모르면 모르고, 알아야 안다'라는 알쏭달쏭한 선문답(=개소리)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독일 폭격기의 폭탄에 요단강을 두어번 건너본 육군이라면 제공권을 빼앗긴 공군에게 도저히 험한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공군이 얼마나 치열한 사투를 벌였는지를 말이다. 도슨(통통배 '문스톤'의 선장)이 상심한 영국군 파일럿에게 "저 친구는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네"라고 심심한 위로를 던지는 것도 이 맥락에서다. 모르면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내 사정을 모르는 이의 비난에 상처 받을 필요 없다. 왜냐면 '모르면 모르고, 알아야 안다.' 이 지점으로부터 '이해'가 출발할 수 있다.

한편으론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우리는 때론 상대가 나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으로 소소한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이 모든 고통을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부과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짊어진 무게는 '용기'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덩케르크>에서는 도슨이 이런 용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유보트의 공격을 받고 도슨에 의해 홀로 구출된 수병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순간의 실수로 조지를 죽이고 만다. 그러나 도슨은 그를 이해한다. 조지를 죽인 살인범은 눈 앞의 수병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가슴 속에 적어도 첫째 아들 몫의 '묘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 포용으로 완결되는, 인간애에 대한 것이다.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도슨의 말처럼 "앞으로 (PTSD로) 제 정신이 아닌 채 살아가야 할" 상처받은 인간 군상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일행을 서슴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갈 수 있는 짐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패배자로 낙인찍혀 살아갈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놀란 감독은 이 나약한 짐승들에게 '맥주 두 병'과 '담요', 그리고 영화 서두의 "공군은 뭘 하는거야?"라는 질문에 대해 말미에서 "자네들의 일은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로 항변하며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결론

전쟁은 생존을 대규모로, 무자비하게 강요한다. 도처에 비극이 널려있고, 죽음의 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도저히 '피'와 '눈물'과 '묘지'가 아니고서는 이 무의미한 죽음들을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기감에 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손쉽게 소비하는데 익숙해 있을 뿐 결코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절제와 침묵이 오히려 해답이 될 수 있다. 전쟁의 진실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모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셋 중 어느 한 공간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기'와 '위로'는 자신이 쥐고 있는 '한 조각 진실'에 매몰되지 않은 채, 나머지 '두 조각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데서 출발한다고, <덩케르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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