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Aug 09. 2017

'은마아파트'라는 이름의 '마시멜로 실험'

삼성역 ~ 테헤란로 ~ 대치동 탐방기

#1.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달궈진 폐가 쥐어짜는 숨결보다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아스팔트를 적셨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대로변을 가득 메운 빌딩 숲은 마치 이 고통스런 습기를 한껏 빨아들이면서 지금껏 육중하게 자라온 정글처럼 보였다.


코엑스를 나와 선릉역을 향해 걸었다. 퇴근시간의 테헤란로는 혼잡했다. 차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왕복 팔차선 도로를 가로막으며 더욱 끔찍한 혼란을 낳고 있었다. 마을버스 한 대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내 바로 앞에서 에어브레이크의 압축공기를 ‘쾅’ 터트리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2.  “여긴 전부 양복에 셔츠 입은 사람들뿐이네. 덥겠다.” “아냐, 차라리 이 사람들은 승리자야. 그래도 야근 안하고 제 시간에 집 가잖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룸메이트 생일파티에 간다는 민주를 선릉역에서 배웅하고 3번 출구로 나왔다. 오늘의 도보여행은 대치동 아파트 단지와 학원가를 거쳐 부동산 뉴스에서만 봐왔던 은마아파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우선 아파트 단지들을 구석구석 구경하며 걸었다. 진선여고 맞은편에 한 아파트가 똑같은 모양에 한 방향으로 늘어서서 시야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외관의 아파트 매매가가 7억에서 15억 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검색하느라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 내 손가락이 눅눅했다. 네이버 어플에 따르면 오늘 습도는 80%였다.  

#3. 전세가가 11억에 달하는 대치동 롯데캐슬리베아파트는 그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중세시대 요새 같은 디자인의 아파트 몸체는 묵직한데다 무척 견고해 보였다. 제복을 차려입은 경비가 경광봉을 들고 검고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치장된 정문을 지키고 서있었다.


경비가 정문을 지키는 건지, 정문이 경비를 지키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으나, 그만큼 정문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정문으로부터 좌우로 뻗어나간 담벼락은 성채를 둘러싸며 외부인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비단 롯데캐슬만 그런게 아니었다. 이 곳 대부분의 아파트가 높은 담벼락, 쇠창살, 철조망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필사적으로 방어해내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미어터지는 출근길 2호선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이라면 후덥지근한 객차 내의 공기가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법이다. 너무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하늘 높이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4. 시야가 흐릿해지는 도로 저 너머 끝까지 내다보아도 학원상가는 끝없이 늘어서있다. 분식집 안에는 4쌍의 엄마와 초등학교 저학년 쯤 돼 보이는 아들딸들이 서로를 마주본 채 식사 중이었다. 어느 상가 1층에는 한의원이 있었는데, 총명탕만을 진열해놓고 있었다. 그 다음 블록에는 교회가 있었는데 “2018학년도 특례수험생과 정시/수시 수험생을 위한 학부모 기도회”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팽팽하게 걸어놓았다.


대치동 학원가의 풍경을 지나 드디어 은마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방을 메고 있는 수십 명의 중학생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잠실야구장 30배 크기의 지하도시를 건설하는 ‘천지개벽’ 수준의 계획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신호등 뒤로 걸려있는 것을 봤다. 이곳의 밀도는 내겐 이미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여기에 사람이 더욱 우글거리게 만들 뭔가를 또 구겨 넣는다는 계획 그 자체로도 현기증이 나는 듯 했다.

#5. 은마아파트의 최고층인 14층 복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늘 목격한 그 어떤 비좁음보다도 비상식적인 비좁음이 느껴졌다. 이곳은 주차공간이 세대당 0.7대로 설계된 탓에 이중주차가 아니고서는 주차가 불가능하다. 아예 이중주차선까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오랜 시간동안 콘크리트가 녹아 종유석처럼 늘어져 있었다. 며칠 전 왔던 비가 새서 콘크리트 종유석에 맺혔다. 젖은 바닥을 피해 기댄 복도 벽면의 높이는 허리 쯤, 두께는 창틀 정도밖에 안 되어 위태로워 보였고, 페인트는 큼직하게 벗겨져 흉했다.


1979년 12월 입주를 시작해 올해로 38년째로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은마아파트는 전용 면적 83㎡(약 28평)에 매매가는 12억쯤이다. 이 아파트의 가격은 지금까지 평당 68만원에서 3400만원으로 50배 뛰었다. 장마기간의 습한 공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무언가가 이 아파트에 숨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세월 따위로는 감가상각 되지 않았다.

#6. 원래 대치동에는 논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63년도 까지는 서울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시작하며 주민 유입을 위해 명문인 경기고와 휘문고를 이곳으로 이전시켰다. 강남 8학군의 시작이었다. 교육환경을 찾아 사람과 돈이 유입됐고, 건축사업은 호황을 맞아 경쟁적으로 건물을 지어 올렸다.


학원도, 서울대로 진학하는 학생도 늘어나면서 대치동은 점점 더 빽빽해졌다. 그 옆에 총명탕을 파는 한의원이, 롯데캐슬이, 학부모 기도회를 진행하는 교회가 함께 들어섰다. 낡은 은마아파트는 곧 무너지고 더욱 높은 밀도의 고층 아파트로의 재건축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도시가 스스로 증식하는 것은 더 나은 곳으로 탈바꿈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돈이 되기 때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7. 1960년대 진행됐던 유명한 심리실험이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 월터 미셸의 ‘마시멜로 실험’이다. 이 실험은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앞에 놓고 15분을 참게 만든다. 참으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먹을 수 있다. 나중에 추적조사를 해봤더니 잘 참았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이후에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은마아파트의 실소유자 중 거주자 비율은 30%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12억에 달하는 집값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외제차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어쨌든 사람이 기꺼이 살 곳은 못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곳의 거주자들은 자녀의 성공이라는 미래의 보상을 위해 서로가 서로의 비좁음을 견디는, 거대한 ‘마시멜로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또 하나의 마시멜로를 보장하지 않는다. 실험 참가자들은 불확실한 보상에 집중하느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 셈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은마아파트의 낡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눈이 팔려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경미화원' 같은 기자를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