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세월호 음모론의 확산 구조’에 부쳐
2017년 4월 3일,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온 지 이틀, 침몰 1084일 째 되는 날이었다.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세월호 음모론의 확산 구조’라는 글이 중앙일보 칼럼난에 실렸다. 대중들이 정치인과 합작하여 음모론을 퍼트리고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내용이 골자다. 그는 세월호와 관련된 “비합리적인 억측”과 “‘합리적 의심’이라는 근사한 말”로 “의심의 기술”이 신성시 되는 사회 풍토에 대해 개탄한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겠다던 자칭 네티즌 수사대 ‘자로’는 잠수함 충돌설을 내놓아 사회 분열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근거 없이 해군을 비난했다. 그 아비규환을 언론과 정치인들이 놓치지 않고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도, 대중적인 호응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자로’ 현상은 충분히 재구성되지 않는다. 이미 기존 정치와 정권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다 못해 팽배해있던 대중에게 ‘자로’는 그저 신호탄이자 방아쇠였을 뿐이다.
시민의 생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은 채 언론에서만 등장하는 ‘페이퍼 정당’적 정치는 시민들의 일상적 정치 참여공간을 축소시켰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드러난 정부의 무능한 위기대응 능력과 일관된 소통부재에 대한 불만은 “가만히 있으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났다. 기자가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질문조차 할 수 없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효능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문가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 반지성주의는 고개를 든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자격으로 수년간 자료를 정리했던, 비전문가였으나 시민이었던 ‘자로’의 어수룩한 선동과 처참한 몰락은 차라리 눈물겹고 윤리적이다 못해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자로’의 실패는 오늘날의 시민정치가 ‘뛰어넘기의 정치’에 갇혀있음을 반증한다. ‘뛰어넘기’는 비일상적이기에 불연속적이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현대사의 질곡에 맞서 몇 번이고 함께 ‘뛰어넘기’를 감행해왔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격렬한 충격에 의존한 진보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 더 일상적이고 안전한 것이어야 한다. 그 둘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다소 의심쩍지만 어쩔 수 없이 ‘합리적 의심’에 근거한 ‘질문’이다. 질문이 쿠데타고 성공한 쿠데타가 혁명이라면, 우리는 일상의 혁명을 위해 좀 더 잦고 지속 가능한 쿠데타를 꿈꿔야 한다. 더 나은 질문을 위한 더 많은 질문은 마땅하지 않은가.
최선의 결과가 언제나 최선은 아니다. 하지만 최선의 과정이야말로 언제나 최선이다. 민주주의란 이런 제한적인 최선의 역설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인줄로,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너만 없었더라면” 따위의 결과론에서 출발한 마음은 기어코 너를 죽이지 않고서는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과거는 스쳐가고 매순간 우리는 오늘의 새로운 곤경에 처할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의 최선이란 돌다리를 매번 성실히 두들기는 것, 그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최선의 과정이야말로 언제나 최선이다. 과정에 충실했으니 결과야 그걸로 족하다는 자세를 통해서만 너와 내가 서로의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 열린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 여백을 딛고 세월호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